소경공계(少卿公系)
부사공
한 충(府使公 韓 沖 : ?∼ 仁宗 7年(1129)
6世)
고려
숙종(肅宗), 예종(睿宗), 인종(仁宗) 때의 문신이다. 부(父)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정종 국구(靖宗 國舅)로
지 서경유수 조(知 西京留守 祚)의 손자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에
보(補)하였는데 명성이 높아 2정(2鄭 : 鄭
沆, 鄭克永) 한 충(韓 沖)이라 하여 칭송이
컸다. 예종 6년 우보궐(右補闕)에 제배(除拜)되고
2년 후 비서소감(秘書少監)을 거쳐 기거주(起居住)에
전임되었다.
송(宋)나라에서
사신이 왔었는데 왕이 계상(階上)에서 맞았다.
며칠 후 사신이 돌아가게 되자 공 등이 아뢰기를
“조사(詔使)는
원래 상인(商人)으로 벼슬이 낮으니 계하(階下)에서
절하도록 하여야 합니다”하니 그대로 쫓았다.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삼았다.
이
때 최홍사(崔弘嗣)가 사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개국사(開國寺) 대장당(大藏堂)을 창건하려
하므로 이를 탄핵하다가 서경부유수로 좌천되었다.
이듬 해 대방공 보(帶方公 보)의 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사촌형 한안인(韓安仁)이 죽음을 당하자
그도 외지에 유배되었다. 이자겸(李資謙)이
패하자, 인종 5년(1127)에 예부시랑을 거쳐
서경유수가 되니 백성들이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다 기뻐하였다.
곧
국자좨주 한림시독학사(國子祭酒 翰林侍讀學士)를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였다가
1129년 1월에 졸하였다. 성품이 강직(剛直)하고
학업에 독실하여 문장력(文章力)이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쓰니 이르는 곳마다 공적(功績)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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