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壤誌(평양지)에 이르기를 仁賢書院(인현서원)은
蒼光山(창광산) 西쪽 산기슭에 자리한 옛 神護寺(신호사)터에 있으니 殷太師(은태사)의 畵像(화상)을 奉安(봉안)한 곳이다.
明宗 19년(갑자년 명종 19년 단기3897, 서기1564)에 監司 鄭宗榮(감사
정종영)이 學古堂(학고당)을 창건하였고 宣朝
9년(병자년 선조 9년 단기3909, 서기1576)에 監司(감사) 金繼煇(김계휘)가 그 제도를 확대하고 洪範書院(홍범서원)으로 개칭하면서
箕子像(기자상)을 尊奉(존봉)할 계획이었으나 미처 성사치 못한 채 선조 25년(단기3925, 서기1592)
임진왜란으로 院舍(원사)가 불탔다. 선조 27년 甲午(갑오)에 監司 李元翼(감사
이원익)이 院舍(원사)를 중건하여
書釰齋(서일재)로 개칭하였고 선조33년 庚子(경자)에 監司 徐渻(감사 서성)이 曺孟頫(조맹부)의
所作(소작)인 "箕子(기자)가 武王(무왕)에게
洪範(홍범)을 陳述(진술)하는 장면을 묘사한 圖像(도상)"을 中國 朝廷(중국
조정)에서 구하여 院中(원중)에 寶藏(보장)하였다.
선조37년 甲辰(갑진)에 監司 金信元(감사 김신원)이 敍倫堂(서윤당)과 東西齊(동서제)를 건립하고 4년후 戊申(무신)에 仁賢殿(인현전)의
賜額(사액:임금이 현판을 새겨 내림)을 받았으며 光海 5년(계축년 광해
5년 단기:3946, 서기 1613)에 監司 鄭賜湖(감사 정사호)가 仁賢殿(인현전)을 重建(중건하였다. 仁祖 元年(계해년
인조 원년 단기3956, 서기1623)에
楊德祿(양덕록)이 箕子畵像(기자화상)을 奉安(봉안)하기를 요청함으로 4년후 丙寅(병인)에 畵師 李臣欽(화사
이신흠)에게 명하여
曺孟頫(조맹부)의 所畵遺像(소화유상)을 模寫(모사)하였으나 봉안하지 못한 채 다음해 정유호란을 만나 眞本(진본)을
逸失(일실)하고 草本(초본)만이 보존되어 있었다. 인조(仁祖) 10년 壬申(임신)에 監司 閔聖徽(감사
민성휘)가 다시 이를
模寫(모사)하여 仁賢殿 敍倫堂(인현전 서륜당)에 봉안하고 弘範堂(홍범당)이라 개칭하였다.
정유호란에 逸失(일실)되었던
眞本(진본)이 僧 韓某(승 한모)씨의 收得(수득)이 되어 長淵 鶴接寺(장연 학접사)에 奉藏(봉장)하였다가 韓僧(한승)이 다시 流離(류리)하게
되자 또 유실될까 염려하여 韓連希(한연희)에게 信託(신탁)하였다. 連希(연희)는 자신이 箕聖(기성)의
後裔(후예)이므로
정성으로 寶藏(보장)하여 4世 孫 晋泰(진태)에까지 전하다가 己亥(기해) 11월 20일 晋泰(진태)가 其函(기함)을 本院(본원)에
奉還(봉환)하니 粹容(수용)과 모습이 毫末(호말)의 차이도 없는지라 櫃(궤)에 넣어 院中(원중)에 安置(안치)하였다가
申丑(신축) 10월 21일에 韓明垕(한명후)등의 呈狀(정상)으로 인하여 成川(성천)의 黃龍山(황룡산)에 移安(이안)되었다.
단기4253년(서기1920)
庚申(경신)에 서울 慶雲洞 韓氏 宗約所(경운동 한씨 종약소)에 移安(이안)하였더니
宗約所(종약소)의 解散(해산)으로 다시 由緖(유서)가
깊은 故 馬韓(마한)의 領域(영역)인 鎭安郡 顔川面(진안군 안천면) 軒韓里 仁賢洞(간한리
인현동) 文聖殿(문성전)에 移安(이안)하고 遠近士林(원근사림)과
後孫(후손)들이 每年 春秋(매년 춘추)에 釋奠禮(석존례)를 行(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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