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훈)록(功臣(勳)錄) 

 
여명공 한진영(여溟公 韓震英 : 宣祖 29年(1596) ~ 孝宗 10年(1659) 23世)
 공의 휘(諱)는 진영(震英)이고 자(字)는 정지(挺之)이며 호(號)는 여명(여溟)이다.  학정공 준(學正公 峻)의 아들이고 별좌공 일휴(別坐公 日休)의 손자이며 선조 29년(1596) 1월 12일생이다.
 공은 천성(天性)이 학업(學業)을 즐겼고 과거 고시(科擧 考試)에 전념(專念)하여 여러 번 향시(鄕試)에 참방(參榜)하여 명망(名望)이 세간(世間)에 현저하였다. 공의 고(考)가 광해시(光海時)에 영도(榮途)를 사절하더니 공도 과업(課業)을 버리고 인조반정(仁祖反正)할 때에 이연 평제공(李延 平諸公)과 더불어 의거(義擧)에 참가하고 인조(仁祖) 2년(1624) 이 괄(李 适)의 난(亂) 때 인조를 공주(公州)로 호행(扈行)함에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을 제수(除授)하여 금화사별제(禁火司別提)가 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 仁祖 5년 1627) 시에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강도(江都)로 향하다 완산(完山)에 이르니 화성(和成)이 됨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병자호란(丙子胡亂 ㆍ 仁祖14年 1636)에 계제 사영(季弟 士英)에게 울면서 일러 왈(曰) 편모(偏母)를 정성껏 봉양하라. 내가 비록 하료(下僚 : 하위직 관료)이나 사은(私恩)으로 대의(大義)를 저버리리요 하고 행(行)하여 죽산(竹山)에 가서 하성(下城)한 소식을 듣고 통곡하여 귀가(歸家)하였다.
 수년 후인 효종(孝宗) 10년(1659) 5월 8일 졸하니 향년(享年)이 64이다. 증 통훈대부사복시정(贈 通訓大夫司僕寺正)이다. 묘지명(墓誌銘)에 공이여 탁월(卓越)한 지개(志槪)로 충효(忠孝)의 행실을 겸비하였도다. 수차의 병란(兵亂)을 당하여 충의지심(忠義之心)이 당시에 현저하였으되 겸퇴(謙退) 자중하니 위대(偉大)한 공의 기풍(氣風)을 진심(眞心)으로 감탄하노라.(崇政大夫 議政府右贊成 宋煥箕, 性 澤 撰) 아들은 통덕랑 익형(通德郞 益亨), 백곡 익성(白谷 益成), 진사 익중(進士 益重), 익상(益相), 익망(益望)이다.
 후손(後孫)인 서원군수 숙(西原郡守 塾)이 근기(謹記)한 시조묘소심득기(始祖墓所尋得記)에 기록하기를 시조유기(始祖遺基)를 차지한 여명공(여溟公)의 손자(孫子) 제광공 성헌(霽光公 聖憲)과 청주병사 근(淸州兵使 根), 이양공 칠세손(夷襄公 七代孫)이 산소를 심득(尋得)하니 유대공언(有大功彦)하여 각처종인(各處宗人)이 재회우묘소(齋會于墓所)하고 특허기동록(特許其東麓)을 용기사산(用其私山)하여 비위알성금호지도고(비爲謁誠禁護之道故)로(1709년) 기축(己丑) 10月 12日에 이폄별제부군(移폄別提府君)하고 그 후에 계장(繼葬) -증 승지부군어황고묘서(贈 承旨府君於皇考墓西) 하였다.
 공이 효종(孝宗) 10년(1659) 5월 8일에 졸하고 배위(配位) 숙인 경주 이씨(淑人 慶州 李氏)는 부사공 시득(府使公 時得)의 따님인데 다음 해인 현종(顯宗) 원년(1660) 12월 7일에 졸하니 월오동(月午洞)에 안장(安葬)하였다가 중년(中年)에 시조묘 동록 해좌(始祖墓 東麓 亥坐)에 이장(移葬) 합조(合兆)하였다.
 공은 일평생(一平生)을 충절(忠節)로 살아왔다. 공의 공(功)을 기리기 위해 공묘(公墓)에서 30m 쯤아래 언덕에 1985년 여름 공의 11대손 순동(巡東)이 글을 지어 이 해 9월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여명공(여溟公)의 위업(偉業)을 기리기 위해 여명회관(여溟會館)을 유기방정리(遺基方井里)에 건립(建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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