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미상편(世系未詳篇 : 高麗)

 
평리공 한휘(評理公 韓 暉 : ?∼恭愍王朝)
고려 충혜(忠惠) 공민왕(恭愍王) 때의 무신(武臣)이다. 선계(先系)는 미상. 일찍이 무관으로 출사(出仕)하여 충혜왕 복위 4년(1343) 8월, 이 운(李 芸) 등이 원제(元帝)에게 충혜왕의 탐음부덕(貪淫不德)을 극간(極諫)함으로 인하여 원사(元使)가 와서 왕을 원경(元京)으로 연행할 즈음, 원사가 왕을 구타하여 압송(押送)하고, 국사정치(國事整治)의 명을 받은 고용보(高龍普)가 사람을 보내와 왕의 시종들을 잡아 가두었으나 한 휘와 송명리(宋明理), 강 찬(康 贊) 등은 평소 용보와 친했던 관계로 면하였다. 그 후 공민왕 12년(1363) 3월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당시 공민왕은 반원(反元) 정책을 실시하면서 친원파를 숙청하고,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는 한편 압록강 서북쪽 10여참(站)과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를 공격하여 모든 성을 수복하고, 왕은 재추(宰樞)들과 요양성(遙陽城)의 군사를 방비할 방책을 의논하여 각 진영(陣營)을 공고히 하고, 지용수(池龍壽)를 순무사(巡撫使)로, 정 찬(丁 贊)을 서북면 도안무사(都按撫使)로 삼으며, 한 휘와 유병(遊兵)을 거느리고 여러 병영(兵營)을 순행하면서 군사정세를 살피도록 하였다. 동왕 12년(1363) 윤 3월,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머물렀는데, 김 용(金 鏞) 일당이 흥왕사 행궁(行宮)을 습격함에 밀직사 최 영(崔 塋) 등과 이를 토벌하여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고, 이어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또 지난 1359년 11월에 홍건적을 격추시킨 공으로 2등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동왕 13년(1364) 3월, 변경에서 세운 공로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었으나 간관(諫官)이 고신(告身 : 任命狀)에 서명하지 않음으로 한 휘는 김제안(金齊顔)의 짓이라 믿고 왕에게 참소하기를 “신은 나라만을 위하여 집을 잊으면서 서리 내리고 눈 오는 한데에서 거처하여 밖으로 적을 막았습니다. 김제안은 나이가 어린데 외람되이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두가지 마음이 있사오니 비단 신의 사첩(謝牒)에만 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릇 달천(撻川) 싸움에 참가한 장사(將士)들의 사첩에도 모두 서명하지 않으니 이는 장수들을 해체케 하고자 함입니다”하였다. 이에 왕이 강제로 서명하게 하고 김제안 등을 파면시켰다.
 동왕 16년(1367), 평리 한 휘는 전시중 경천흥(前待中 慶千興), 지도첨의 오인택(知都僉議 吳仁澤), 전평리 목인길(前評理 睦仁吉), 삼사우사 안우경(三司右使 安遇慶), 삼사좌사 김원명(金元命), 전밀직부사 조희고(趙希古), 판개성부사 이 순(判開城府事 李 珣), 상호군 조 린(趙 璘), 윤승순(尹承順), 류인재(柳仁梓), 강원보(姜元輔), 대호군 한덕경(大護軍 韓德卿) 등으로 더불어 비밀히 의논하기를 “신 돈(辛 旽)은 간사하고 망령되며, 음흉하고 교활하며,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기를 좋아하며, 급기야 훈구(勳舊)를 쫓아내고 무고한 사람을 죽여 당세가 날로 성할 뿐 아니라, <도선밀기(道銑密記)>에 〔중도 아니요 속(俗)도 아닌 자가 정사(政事)를 문란케 하고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반드시 이 사람이 장차 국가의 큰 환(患)이 될 터인즉 마땅히 왕께 아뢰어 빨리 이를 제거함만 같지 못하다”하고, 신 돈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비밀이 사전에 누설되어 11월, 경천호, 오인택, 목인길, 안우경, 김원명, 조희고는 남예(南裔)로 장류(杖流)시켜 관노(官奴)를 삼고 그 집을 몰적(沒籍)하였으며, 한 휘, 이 순, 조 린 등은 외지로 유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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