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록(孝行錄)

 
청원군 한성보(淸原君 韓聖輔:광해 12년(1620)~숙종23년(1697) 22世)
 조선 후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자는 여석(汝碩) 호는 이은정(理隱亭)이다. 청흥군 수원(淸興君:壽遠)의 아들로 청녕군 덕급(淸寧君:德及)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는 처사공 영원(處士公 榮元)의 따님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문인으로 학문은 물론이요 심성을 닦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음보(蔭補)로 여러 관직을 거쳐 예안, 공주, 남원, 진위, 대구, 성천, 순흥, 연안등 아홉 주군(州郡)과 가선대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 하였다. 증조부인 청평부원군 응인(淸平府院君 應寅) 의 작위(爵位)를 이어 받아 청원군(淸原君)에 습봉(襲封)되었고 경종(景宗)때 아들(配夏)의 현달(顯達)로 정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공은 평소 부모 모심에 있어 화순(和順:고분고분하여 시키는대로 잘 쫓음)온유(溫柔 : 마음이 따뜻하고 유순함) 하고 경애(敬愛): 공경하고사랑함) 와 지효(至孝 : 지극한 효행)로써 봉양(奉養 : 부모를 받들어 모심)하였고 현종 10년(1669)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고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자 여러 아우 들을 이끌고 4년간이나 여막(廬幕)에서 거처하면서 곡배(哭拜 : 슬픔을 참을 수 없어 큰소리로 울며 산소에 성묘함) 하여 애훼골립(哀毁骨立: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여 몸이 바싹 여윔) 할 정도로 효성을 다하였다. 공은 우암의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 : 성명과 이기의 관계를 설명한 유학)과 경사(經史:성인이 지은책. 즉 사서오경과 같은 유교의 성전과 역사책)에 통달(通達)하여 학식(學識)이 고매(高邁:뛰어나게 품위가 높음)하고 언언사사(言言事事 : 모든말과 하는일)가 준정(峻正:엄격하고 바름) 하였다.
숙종15년(1689) 우암이 모함으로 해를 입자 애석 통분(哀惜痛憤:슬퍼하고 아깝게 여기며 몹시 분개함)하며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9년간을 초야(草野:시골촌)에 묻혀 독서로 소일 하다 78세를 일기로 돌아가니 숙종은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 하였다. 배위는 재령 이씨(載寧 李氏) 전주 리씨(全州 李氏) 남원 양씨(南原 楊氏) 세분이었나 아들이 없어 조카인 청은군 배하(淸恩君:配夏)를 계후입양(繼後入養)하였다. 부실(副室)에서는 진사(進士) 배로(配魯), 배우(配愚)가 있다. 공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엮임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선치수령으로 명성(名聲)이 높았다. 특히 회덕현감 재직시의 선정(善政)을 영원히 칭모(稱慕)하기 위하여 현종 11년(1670)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읍내동 큰 암석(岩石)에 현감한공성보몰세불망(縣監韓公聖輔沒世不忘)이라 각자(刻字)하여 다소 훼손되었으나 3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보존(保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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