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록(孝行錄)

 
감사공 한용화(監司公 韓用和 : 英祖 8年(1732) ∼ 正祖 23年(1799) 27世)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예지(禮之), 호는 광암(廣庵), 동지중추부사공ㆍ증 영의정 후유(同知中樞府事公 · 贈 領議政 後裕)의 아들로 대사헌공 · 증 좌찬성(大司憲公 · 贈 左贊成 顯暮)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여흥 민씨(麗興閔氏)는 문충공 익수(文忠公 翼洙)의 따님이다.
 영조 30년(1754)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여러 관직을 거쳐 군자정, 춘천부사, 참의, 승지 등을 역임하고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공은 평소(平素) 부모에 대한 효성(孝誠)과 숭조정신(崇祖精神)이 지극(至極)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이 독실하여 항상 저녁에 시중을 들고 나서 문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코고는 소리를 들은 뒤에 물러나왔다. 상(喪)을 당하였을 때 나이 60이 되었으나 항시 상복을 벗지 않았다.
 어느날 전(奠 : 제물)을 늦게 올리자 집안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은즉 땔 나무가 없어 그랬던 것을 알고 그 뒤로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불을 때지 않았고 상기 5년 동안을 거상(居喪 : 부모상을 당하고 있음)하면서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공은 정조 17년(1793) 양절공(襄節公 : 確)의 신도비대석(神道碑臺石)을 보수할 때 여러 일가들과 함께 장남인 제천공(提川公:象履)과 부자(父子)가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많은 헌성과 협조로 이 사업을 완수(完遂)하였고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시조부군(始祖府君)의 산소에 참배하고 그 재실을 보니 기둥이 기우러지고 담장과 뜰이 허물어졌으며 또 건축한지가 100년이 지난지라 몹시 노후(老朽)되었음을 보고 곧 자기 녹봉에서 출연(出捐)하며 일가들과 힘을 모아 두해를 걸쳐서 공사를 마치고 그 재사(齋舍)의 이름을 세일재(歲一齋)라 하는 등 위선사(爲先事)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청풍 김씨(淸風 金氏)니 시직공(侍直公 : 致萬) 증 영의정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 3녀를 낳으니 장남은 제천공(提川公 : 象履) 이고 2남은 판관공(判官公 : 景履) 증 좌찬성인데 익정공(翼貞公 : 用龜)에게 계후 입양 되었다.
 位置 : 龍仁郡 南面 倉里 先塋下.

번호     글 제 목 조회
1 예빈경공(禮寶卿公) 10146
2 문혜공(文惠公) 8701
3 제학공(提學公) 6837
4 사숙공(思肅公) 5599
5 한대순 7133
12345678910,,,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