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록(孝行錄)

 
청녕군 한덕급(淸寧君 韓德及 : 宣祖 10年(1577) 顯宗 1年(1660))
 공은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득지(得之)요 호는 월곡(月谷)이다. 선조(宣祖)때 우의정인 충정공 응인(忠靖公 : 應寅)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정경 부인 전주리씨(全州 李氏)니 현감공(縣監公:聃齡)의 따님이다.
 선조 34년(1601)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추천(推薦)으로 차례에 따라 봉사(奉事)에 임명하였으나 취임(就任)하지 않으니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되었다가 주부(主簿)로 옮겼다.
 외직(外職 : 지방공무원)으로는 옥천군수(沃川郡守)외 6개 군수와 해주(海州) 및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내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러 청녕군(淸寧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공은 천성(天性 : 타고난 성품)이 온후(溫厚 : 따뜻하고 조용함)하고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였다.
 광해군 때 간사한 신하들이 모함(謀陷 : 꾀를 써서 남을 못된 구렁에 빠지게 함)으로 충정공이 삭탈관작(削奪官爵 : 죄를 지은 사람의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빼버림)을 당하고 광주(廣州)로 내려가게 되자 공도 관직을 떠나게 되어 충정공을 따라 내려가서 억울하심을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하여 드리고 받들어 모심에 정성을 다하였으나 그 보람도 없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그 원인으로 병이 나자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옆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비운(悲運 : 슬픈 운수)속에 세상을 떠나니 묘소 옆에 오두막집을 짓고 3년간을 거기에 기거하면서 슬퍼하고 탄식하는 그 모습을 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다. 이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가까운 시대에 보기 드문 효자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다섯 왕조를 섬기고 84세에 별세하니 현종은 예관(禮官 : 예의, 제향 등을 담당하는 관원)편에 재물과 제문 등을 내리어 제사케 하였다.
 묘표는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이 찬(撰)하고 대사헌 윤문거(大司憲 尹文擧)가 썼으며 현종 7년(1666)에 세웠다.
 음기(陰記)에 쓰기를 공을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공은 진실로 복인(福人)이로다. 영화(榮華)로운 환경속에 살다가 장수(長壽)를 누리고 편안히 별세하여 감탄하였다고 써있다.
 묘소앞 약300m전방(前方)에 공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우암선생(尤庵先生 : 宋時烈)이 찬(撰)하였고 동춘 송준길이 비문을 썼으며 대제학(大提學) 김수항(金壽恒)이 전(篆)하여 현종5년(1664)에 세웠다.
 배위는 정부인 광주 김씨(光州 金氏)니 사계선생 장생(沙溪先生 : 長生)따님이다.
 슬하에 3남을 낳으니 장남은 청흥군 수원(淸興君 : 壽遠)이고 차남은 증 좌승지 선전관공 지원(宣傳官公 : 智遠)이며 3남은 첨정공 지원(僉正公 : 志遠)이다. 부실(副室)에서 증 호조참판 만호공 성원(萬戶公 :  聲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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