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록(學行錄)

 
문간공 한장석(文簡公 韓章錫 : 순조 32년(l832)~고종 31년(1894) 30世)
조선 말기의 문신이요 대학자로 자는 치수(雉綏), 호는 경향(經香), 미산(眉山), 참판공 증 찬성 필경(參判公 贈 贊成:弼敬)의 아들로 태인공 증 판서 원리(泰仁公 贈 判書 元履)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풍산 홍씨(豊山 洪氏)는 문간공 석주(文簡公 奭周)의 따님이다. 철종 9년(185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 봉사(奉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올랐으며 고종 8년(1871) 감제(甘製)에 장원(壯元)하여 이듬해 정시 문과(庭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후 주서(注書), 부수찬(副修撰), 헌납(獻納), 병조정랑(兵曹正郞), 시강원 문학(侍講院 文學), 부응교(副應敎) 등을 역임하다가 용강현감(龍岡縣監)으로 나갔다. 동왕 14년(1877)다시 부교리(副校理)로 있다가 이듬 해 동부승지(同副承旨),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다. 상기가 끝난 뒤 오위장(五衛將), 공조참의(工曹參議),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이조참의(吏曹參議)등을 지냈다. 동왕 19년(1882) 시강원 보덕(輔德)을 겸하였고 병조참판(兵曹參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이듬해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이 되었다. 동왕 21년(1884) 신법(新法)이 행해지고 의제(衣製)가 바뀌니 전 가족을 이끌고 아산(牙山) 황곡(黃谷)에 내려가 누차 올라오라는 왕명(王命)이 내렸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임명되었다.
동왕 23년 지춘추(知春秋), 지경연(知經筵),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이 해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사직(離職)하고 상기를 마치니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에 임명되어 사직상소를 5번이나 올렸으나 왕은 이를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였다. 그후 또 규장각 제학, 이조판서, 지돈녕부사 등을 거쳐 동왕 27년(1890)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로 옮겼고 숭정대부에 올랐다. 동왕 29년에 다시 대제학에 임명되어 소경왕후(昭敬王后)의 존호(尊號)를 의정하고 사직하였다. 그 후 판의금부사를 세 번, 우참찬, 좌부빈객을 각 한 번씩 내렸으나 혹은 병을 이유로 사양하기도 하고, 혹은 억지로 나가기도 하였는데 오래 있지 않았다.
동왕 31년에 졸하니 향년 63세이다. 왕은 공의 부음(訃音)을 듣고 제문을 지어 예관을 파견하여 치체(致祭)하였다. 처음 시호(諡號)는 효문(孝文)으로 내렸다가 문간(文簡)으로 개시하였다. 배위 정경부인 한산 이씨(貞敬夫人 韓山 李氏)는 이조판서 효헌공 겸좌(孝憲公 謙佐)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 4녀를 생하니 장남은 제학공(提學公 : 光洙)이고 차는 참의공(參議公 : 昌洙)인데 증 제학공 윤석(贈 提學公 胤錫)에게 계후입양(系後入養)되었다. 부실에서 유1남하니 명수(明洙)이다.

번호     글 제 목 조회
1 예빈경공(禮寶卿公) 10024
2 문혜공(文惠公) 8564
3 제학공(提學公) 6762
4 사숙공(思肅公) 5519
5 한대순 7021
12345678910,,,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