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倡義錄 : 義士)

 
열사 한정도(烈士 韓正道 : 光武 4年(1900)∼1920 36世)
공(公)은 독립군 열사(獨立軍 烈士)이다. 휘(諱)는 정도(正道)이고 초명(初名)은 정문(正文)이다. 치복(致福)의 셋째 아들이고 진기(普器)의 손자이며 충성공 명회(忠成公 明澮)의 22대손이다. 공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미륙동(平安北道 新義州市 彌勒洞)에서 광무(光武) 4년(1900) 8월 10일에 태어났다.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양시(平安北道 龍川那 楊下面 楊市)에서 1919년 3월 1일 12시경 3 · 1 독립운동(獨立運動)에 군중시위(群衆示威)의 선두(先頭)에서 평소 은밀 (隱密)히 보관하고 있던 태극기(太極旗)를 흔들며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시위(高唱 示威)하다 양시왜경(楊市倭警)에게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新義州 形務所)에서 약 3개월간 투옥(投獄).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으로 불구(不具)의 몸이 되어 석방(釋放)되었다.
그 후 동년(1919) 10월 5일 남만주(南滿洲)로 망명(亡命) 오직 일펀단심(一片丹心) 조국독립운동(祖國獨立運動)을 위해 남만주 요녕성 서로군정서 의용군(南滿洲 遼寧省 西路軍政署 義勇軍)에 편입(編入)되어 투쟁하다 백두산(白頭山) 서방 약 100km 지점(長春南方 約 110km지점) 산수림중(山樹林中)에서 1921년 6월초 일본군인 산본헌병(日本軍人 山本憲兵) 등을 공등 6인이 사살(射殺)하는 쾌거(快擧)를 이루었다. 동년 6월 하순(下旬) 의용군 정사(義勇軍 正士)로서 제일중대 김우권(第一中隊 金宇權)의 영솔(領率)로 출동하였다가 요녕성 유하현 삼원포 야저구 김교성가(遼寧省 柳下縣三原浦 野猪溝 金敎成家)에서 일본군 약 400여명의 불시습격을 받아 교전중(交戰中) 공을 비롯한 여러명이 전사(戰史)하였다. 묘(墓)는 없다. 배위(配位) 경주 이금여(慶州 李今汝)는 공이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할 때 내조(內助)가 컸다고 하며 1977년 5월 27일 졸함에 경기도 부천시(京畿道 富川市) 신앙촌묘지(信仰村幕地)에 안장(安葬)하였다. 아들은 이용(利用)이다. 1991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고 1993년 6월 1일 국가유공자 증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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