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제공계(登第公系)

 
서성 한석봉(書聖 韓石峯(濩) : 中宗 38年(1543)~宣祖 38年(1605) 19世)
선생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서예가(書藝家)이다. 휘(諱)는 호(濩)요, 자는 경홍(景洪)이요,호는 석봉(石峯). 청사(淸沙)이다. 증 부사공 언공(贈 府事公 彦恭)의 아들이고 정랑공 세관(正郞公 世寬)의 손자이다.
명종(明宗) 22년(156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명나라에 사절로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별제감찰(別提監察),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사어(司禦) 등을 지내고 한성판관(漢城判官)을 거쳐 정랑(正郞)으로 재임중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이 일자 선조(宣祖)를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광국선무호성원종 공신(光國宣武扈聖原從功臣)이 되고 왜란(倭亂) 관계로 투사의 명을 받고 명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난이 끝나자 가평군수(加平郡守)로 나가 천자문(千字文)을 언해(諺解)하니 선조 33년(1600) 9월 선생이 58세 때였다. 흡곡현령(翕谷縣令)도 지냈다. 만년(晩年)에 금천석봉산(金川石峯山)하에서 선조 38년(1605) 63세로 졸하였다.
아들은 사과(司果) 민정(敏政)이며 증 호조참의(贈 戶曹參議)이다. 어머니 홍주 백씨(洪州 白氏)가 떡장사를 하며 글공부를 시켰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의 묘갈(墓碣)에 의하면, “송도(松都)에서 났으며, 점(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희지(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서법(書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부)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체(體)를 배웠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진위(眞僞)가 문제가 되는 악의론(樂毅論) · 동방삭찬(東方朔贊) · 황정경(黃庭經) 등의 소해(小楷)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천분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공(工)과 힘(筆力)이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는다 하여도 동기창(董基昌)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러한 경지는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논할 수 없다고 김정희(金正喜)는 말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가 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 또 이로부터 사자관 제도가 이루어졌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 · 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 · 이윤식비(李允湜碑) · 이별제공집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 · 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長湍) 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卞墓表額), 과천(果川) 유용비(柳容碑) · 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 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 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 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隣碣) · 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 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 기자묘비(箕子墓碑) 등을 썼다.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평하였다. 그로부터 비롯되어 사자관체(寫字官體)라는 서체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千祿體)라 한다.
선조(宣祖)는 한석봉의 글씨를 궁전(宮殿)에 걸어놓고 감탄하여 가상(嘉賞)했다. 마침내 선조는 가평군수(加平郡守)인 한석봉에게 하지(下旨)하였다. 천자문(千字文)을 언해(諺解)케 하고 국민교본(國民敎本)으로 삼기로 하였으니 이는 선조 33년(1600) 9월 선생이 58세 때였다.
지금도 이 언해 천자문은 많이 보급(普及)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군이 벽제관(碧蹄館)에서 승리한 여세(餘勢)로 선조(宣祖) 26년(1593) 2월 12일 3만여 명을 투입하여 행주산성(幸州山城)을 내습(來襲)하니 지리적 이점(地理的 利點)과 아군의 필승의 기백으로 승전(勝戰)하는데 부녀자들의 행주 치마로 나른 돌이 많은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이 승전을 기리기 위해 선조 35년(1602) 덕양산정(德陽山頂)에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 : 大理石으로 되어 있는 舊碑)를 세우니 최 립(崔 笠)이 비문을 짓고 한석봉(韓石峯) 선생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비문 끝의 추기(追記)는 이항복(李恒福)이 지었고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비석이 오래되어 훼손(毁損)이 심해지자 1907년 비각을 새로 개축(改築)하였다. 그러나 또 훼손되어 행주산성 보수정화사업(補修淨化事業 : 1969~1970)에 따라 대첩비각(大捷碑閣 : 舊碑에)을 세웠다. 비 상부(上部)에 금이 간 것은 비를 세운 후 왜인(倭人)이 훼상시켰다고 전한다. 행주대첩비 구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京畿道 有形文化財) 제74호로 1978년 10월 10일 지정(指定)되었다.
조선조 대학자(大學者)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을 향사(享祀)한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있는데 퇴계선성이 졸한지 4년만인 선조(宣祖) 7년(1574) 유림(儒林)들이 상의하여 그가 만년(晩年)에 독서하던 곳인 도산서당(陶山書堂) 뒤에 이듬 해 도산서원을 세웠다. 선조로부터 도산서원의 액자(額字)를 받아 사당(祠堂)에 걸어놓고 퇴계 선생을 향사하였는데 글씨는 선조 8년(1575) 한석봉(韓石峯) 선생이 썼다.
韓石峯 선생의 예(隸), 초서(草書)로 천자문(千字文)을 선조 30년(1597) 가을에 썼고 목판(木版)인 것을 탁본(拓本)으로 남겨놓았는데 여기에는 선생이 서명, 날인(署名, 捺印)하여 남겨 놓았다.
 



 이글은 고문진보(古文眞寶)중의 한편으로 중국역대(中國歷代) 정대(亭臺), 누각(樓閣)에  대한 수많은 기문(記文)중에 우수(優秀)한 문장(文章)인 악양누기(岳陽樓記)의 부분(部分)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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