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빈윤공 한연(禮賓尹公 韓 連 : ?∼? 7世)
함경남도 안변군 안변읍(咸鏡南道 安邊郡 安邊邑) 南쪽에 있는 풍류산(風流山) 서리동(鋤里洞)에 두 분의 묘(墓)가 있는데 子坐 午向으로 자리한 분이 고려(高麗)때 예빈 윤(禮賓尹)의 벼슬을 지낸 휘(諱) 연(連)의 묘소(墓所)이고 조금 떨어진 오른쪽 기슭에 임좌 병향(壬坐 丙向)의 묘소가 예빈윤공(禮賓尹公)의 아들인 안원군(安原君) 휘(諱) 유(裕)의 묘소이다.
오랜 세월을 지내는 사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등 병화(兵火)를 입어 한때 실호(失護)하는 아픔을 겪다가 1804년에 안변읍내에 살던 公의 후손 성연(聖淵)이 산송(山訟 : 墓地 關係로 하는 訟事)으로 손가(孫哥) 등과 다투던 中인데 그로 因하여 두 분의 산소임이 저절로 드러나니 문중(門中)에서는 마침내 봉분(封墳)을 개수 (改修)하고 묘역을 다듬었다.
보첩(譜諜)에 보면 公이 예빈윤(禮賓尹)에 오르고 1308년 7월 10일에 王의 병환(病患)이 위독(危篤)하여 조정(朝廷)에서는 公을 元나라에 보내서 심왕(瀋王)에게 보고(報告)한 기록(記錄)이 있음을 본다.
안변부사(安邊府使) 이 수(李 隧)가 지은 묘정(墓庭) 비문(碑文)에 보면 公의 풍성(豊盛)한 적덕누인(積德累仁 : 덕을 쌓고 어질게 살아온 바를 이름)이 신명(神明)과 인간(人間)의 도움을 얻어 실호(失護)된 유택(幽宅)을 봉심(奉審)할 수 있었다고 傳하여 온다.
또한 신의왕후(神懿王后)를 탄육(誕育)한 가문(家門)이 되었으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덕(功德)이 무성하고 착실(着實)하여 사적(事蹟)이 많을 터인데도 난세(亂世)를 살아오는 사이 없어지니 망극(罔極)한 후손들의 심회(心懷)를 위로하고 있다.
다만 그 祖上을 밝힐 수 있는 일이니 가계(家系)의 대략(大略)을 적어서 후일(後日) 子孫들의 고증(考證)으로 삼고자 함이다. 卽, 公의 아드님은 안원군(安原君) 유(裕)요 손자(孫子)는 좌정승(左政丞)에 추증(追贈)된 규인(珪仁)이요 증손(曾孫)은 다섯분인데 맏이가 도염영(都染令) 정간(貞幹), 둘째는 상장군(上將軍) 룡(龍), 셋째는 도총제(都摠制) 시대(時大), 넷째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대공(大公), 다섯째는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영 문하부사(領 門下府事), 경민공(景敏公) 경(卿)으로 신의왕후(神懿王后) 의 아버지이다.
예빈윤공(禮賓尹公)은 고려 중엽 처음으로 관북(關北)의 안변부 익실방금구동(安邊府 翼室坊琴龜洞)(지금의 安邊郡 衛益面 琴基里)으로 이사하여 정착(定着)하였다. 그후 子孫들이 다시 함주(咸州 : 지금의 咸興市를 中心한 一帶) 지방에 살았다.
※선대(先代)의 산소(山所)를 되찾는 과정에서 가장 힘쓴 이는 公의 원손(遠孫) 한 익(韓 益)과 찰방(察訪) 한계옥(韓啓玉)이고 묘정비문(墓庭碑文)을 청(請)한 이는 한대곤(韓大坤), 한익해(韓翼海)이며 비문(碑文)을 지은이는 안변부사(安邊府使) 이 수(李 隧)이다.
※배위(配位)의 성씨(姓氏)는 병란(兵亂)으로 유사(遺史 : 記錄 卽 家牒)가 일실(逸失 : 없어짐)되어 실전(失傳)되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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