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군 한유(安原君 韓 裕 : ?∼? 8世)
公은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배위(配位)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증조(曾祖)요 예빈윤공(禮賓尹公 : 連)의 아들이다.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국(開國 : 建國)하고 왕후(王后)의 친정(親庭) 조상(祖上)에게 추증(追贈)하였으니 안원군(安原君 :裕)에게는 증 순성적덕좌명보리공신 숭정대부문하시랑 찬성사 판도평의 사사 겸 판호조사 안원군(贈 純誠 積德佐命 輔理功臣 崇政大夫 門下侍郞 贊成事 判都評議 司事 兼 判戶曹事 安原君)을 삼았다.
公의 墓所가 임진왜란, 병자호란(壬辰倭亂 丙子胡亂)등 병란(兵亂)으로 일시 실전 (失傳)하였다가 公의 아버지 예빈윤공(禮賓尹公 : 連)의 묘소를 찾을 때 같은 위치(位置)에서 찾았다. 즉 함경남도 안변군 안변읍(咸鏡南道 安邊郡 安邊邑) 남쪽에 있는 풍류산(風流山) 서리동(鋤里洞)에서 公이 아버지 예빈윤공(禮賓尹公)과 같이 안변부 익실방 금구동(安邊府 翼室坊 琴龜洞)에 살았으나 그 孫子代에 와서 함주(咸州) 지방으로 옮겨 살았다고 傳해오고 있다. 지금도 옛 터에는 그때 남겨진 주춧돌과 부서진 벽돌 조각들이 남아 있으며 여기서 東南方 十里쯤에 풍류산(風流山)이 있고 그 산 아래 서리동(鋤里洞)에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여기가 韓氏門中의 묘소(墓所)라고 하나 세대(世代)가 오래되어 분명(分明)하게 지적(指摘)해 말할 수가 없던 차에 그 고을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묘지관계(墓地關係)로 쟁송사건(爭訟事件)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公의 아들 규인(珪仁)의 墓가 자연히 발현(發現)되었고 그로부터 60年 되는 순조(純祖) 4년(1804)에 예빈윤공(禮賓尹公 : 連)과 안원군(安原君 : 裕) 父子兩世의 墓所를 찾기에 이른 것이다.
망극(罔極)한 일은 누차(累次) 병란(兵亂)으로 유사(遺事 : 옛기록)를 잃은바 되니 公의 배위(配位) 성씨(姓氏)를 살필길이 없다.
 
번호     이 름 조회
1 한연 3479
2 한유 3651
3 한규인 3276
4 한용 3411
5 한경 3607
6 한일 3746
7 한금강 4321
8 한창수 4386
9 한융전 4383
10 한교 446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