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공 한규인(政丞公 韓圭仁 : ?∼? 9世)
公의 諱는 규인(珪仁)이니 안원군(安原君) 유(裕)의 아들이요, 예빈윤공(禮賓尹公)의 손자(孫子)이다. 조선 태조(朝鮮 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배위(配位 : 王后)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조부(祖父)로서 익조공신(翊祚功臣)에 특진(特進) 보국숭록 대부문하 좌정승 도평의 사사 겸 이조사 안천부원군(輔國崇祿 大夫門下 左政丞 都評議 司事 兼 吏曹事 安川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公의 子孫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여러 차례 난리(亂離)를 겪는 사이 문적(文籍 : 家牒)을 일실(逸失 : 遺失)하여 中間年代에 山所를 잃어버린 바 되어 원근(遠近)에 사는 후손들이 성묘(省墓)할 길이 없어 한탄하던 차에 신명(神明)의 도움으로 안변읍(安邊邑)에 사는 金氏 등이 장지관계(葬地關係)로 다투다가 송사(訟事)가 제기(提起)되었는 데 바로 그들이 다투던 장소(葬所)가 좌정승(左政丞 : 珪仁)의 묘소(墓所)라는 확증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는 金哥들이 公의 묘소를 몰래 헐어버리고 그 어미를 장사했는데 수 십년 후에 같은 金哥가 그 곁에 묘를 쓰려다가 시비(是非)가 일게된 것이다. 이곳이 함경도 안변 풍류산(咸鏡道 安邊 風流山)의 묘좌 유향(卯坐 酉向)의 좌정승 규인(左政丞 珪仁)의 墓所이다.
公이 五男을 두었는데 첫째는 도염령(都染令) 정간(貞幹)이요, 둘째는 상장군(上將軍) 용(龍)이요, 셋째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시대(時大)요, 넷째는 좌정승(左政丞) 대공(大公)이요, 다섯째가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경(卿)이니 곧 이태조(李太祖)의 왕비(王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아버지이다.
위의 기록(記錄)은 公의 신도비(神道碑)에 있는 것을 옮긴 것으로 公의 외손(外孫)되는 가선대부 동지춘추관사(嘉善大夫 同知春秋館事) 윤봉조(尹鳳朝)가 글을 지었고 이를 부탁 한 이는 후손 첨지(僉知) 극일(克一), 유학(幼學) 석진(錫晋), 참봉(參奉) 기(基), 석기(錫基) 등이 감독(監督)과 각자(刻字) 및 돌을 다듬는 일까지 마쳤다.
公의 배위(配位) 성씨(姓氏)는 선대조(先代朝)의 경우와 같이 전해오는 문적(文籍)이 없으니 살필 길이 없다.
 
번호     이 름 조회
1 한연 3480
2 한유 3651
3 한규인 3280
4 한용 3411
5 한경 3609
6 한일 3747
7 한금강 4322
8 한창수 4388
9 한융전 4384
10 한교 446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