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공 한창수(良靖公 韓昌壽 : ? 1440 11世)
公의 諱는 창수(昌壽)이니 초명(初名)은 장수(長壽)이다. 안천부원군 경(安川府院君 卿)의 넷째 아들이고 정승공 규인(政丞公 珪仁)의 손자이다. 신의왕후(神懿王后)와 동복(同腹 : 兄弟)으로 관작(官爵)은 숭록대부 판돈녕부사(崇祿大夫 判敦寧府事)에 오르고 시호(諡號)는 양정(良靖)인데 수(壽)는 76歲 하였다고 전(傳)하여 온다. 그러나 公의 묘소(墓所)와 배위(配位)의 성씨(姓氏) 및 묘소(墓所)가 난세(亂世)에 일실(逸失 : 잃어버림)되니 전(傳)하여 오는 바 없어 민망(憫忙)함이 크다. 다음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있는 유사(遺事)이다.
 
숭록대부판돈녕부사시양정한공(휘 창수)유사(崇祿大夫判敦寧府事諡良靖韓公(諱 昌壽)遺事)(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
세종(世宗) 22年 경신(廣申 : 檀紀 3773 · 西紀 1440) 11月 29日 판돈녕부사 한창수(判敦寧府事 韓昌壽)가 졸(卒)하다. 公은 함길도 안변(咸吉道 安邊)사람으로 초명 (初名)은 장수(長壽)이다. 처음에는 신의왕후(神懿王后)와 동복(同腹)이라 하여 관직에 보(補)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상호군(上護軍)에 이르렀다가 얼마 아니되어 안원군 (安原君)을 봉하였다. 太宗 15年 乙未(檀紀 3748 · 西紀 1415) 봄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오르고, 여름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옮겼으며, 世宗 3年에 특별(特別)히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에 오르고, 世宗 10年 무신(戊申)에 숭록대부 판돈녕 부사(崇祿大夫 判敦寧府事)에 올랐다. 世宗 18年 병진(丙辰)에 궤장(궤杖)을 내렸고 병(病)으로 사직하여 이때에 이르러 卒하니 나이가 76歲였다. 부음이 들리자 특별히 부의를 내리고 조상(弔喪)하게 하였다.
시호(諡號)를 양정(良靖)이라 하니 온량(溫良)하고 호악(好樂)함이 양(良)이요, 유직(柔直)하고 끝을 잘 맺은 것을 정(靖)이라 하다.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代를 이을 後孫이 없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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