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절공 한종유(文節公 韓宗愈 : 忠烈王 13年(1287)~恭愍王 3年(1354) 9世)
공(公)은 고려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忠肅), 충혜(忠惠), 충목(忠穆), 공민(恭愍)왕 때의 문신이다. 휘(諱)는 종유(宗愈)요 자는 사고(師古)이며 호는 복재(復齋), 양화도(楊花徒)이고 호군공 영(護軍公 英)의 아들이며 판관공 언(判官公 彦)의 손자이다.
충렬왕 30년(1304) 과거에 급제하여 사한(史翰)에 들어갔고 충숙왕 때 사관수찬(史館修撰)이 되었다. 그 뒤 예문관 옹교가 되었고, 충숙왕 7년(1320) 정방(政房)의 전주(銓注)에 참여하였다.
이 때 심왕 고(瀋王 暠)가 왕위를 노려 충숙왕과 대립하자 왕을 위하여 노력한 이조년(李兆年)과 더불어 의논하고 간신을 잡아 물리치니, 심왕에게 왕위를 전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충혜왕 1년(1331)에는 밀직제학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뽑게 되었다. 이 때 최안도(崔安道)의 아들 경(瓊)이 부정으로 합격하자 간관 허 옹(許 邕), 정언 조 렴(趙 廉), 정천유(鄭天濡) 등 이 글을 올려, 시험이 공정하지 못하니 다시 시험을 치르기를 청하였다. 또한, 충숙왕 복위 8년(1339) 조 적(曺 적)의 난 때에는 정승 김 륜(金 倫)과 같이 이 난을 처리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는 조적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불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시종 충절로 충혜왕을 변호하였다. 그 결과 1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부모와 아내와 자식에게도 벼슬이 주어졌고 전답과 노비도 받게 되었다. 1343년에는 한양군(漢陽君)에 봉해지고 찬성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왕이 악양(岳陽)에 행차할 때에 왕에게 충성한 사람은 그와 이조년 뿐이었는데, 이조년이 죽자 원나라에서는 원자(元子)를 부탁하고자 그를 부르게 되었다. 1344년에 조칙으로 충목왕을 모시고 귀국하여 정사를 보필하게 되어 좌정승에 제수되었다.
충정왕이 왕위에 오른 뒤 권신들이 정치를 멋대로 처리하자 부원군(府院君)으로 향리에 물러앉아 도읍에 나타나지를 않았다. 공민왕 1년(1352)에는 김승택(金承澤)과 함께 서연(書筵)에 들어가니 왕이 예우로써 대접하고 재상을 삼고자 하였다 한다.
동왕 3년(1354) 6월 한양(漢陽) 옛집에서 68세로 졸하였다. 왕은 조회를 보지 아니하고 예관으로 하여금 초상을 치르게 하고 시호(諡號)를 문절(文節)이라 내렸다.
묘명(墓銘)에 이르기를 “여러 임금을 내려 섬김에 충성을 다하고 근로(勤勞)를 다하니 초선(貂蟬 : 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 高官의 冠의 장식)의 관면(冠冕 : 冠은 官의 총칭)이 문채(文采)있도다.”라고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에 실려 있다.
배위(配位) 경주 이씨(慶州 李氏)는 가락군 관(駕洛君 琯)의 따님이며 아들은 처사 백순(處士 伯淳), 호군 중명(護軍 仲明), 판사 계상(判事 季詳)이다.
사위 중에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 희(僖)가 있는데 고려 좌정승(考慮 左政丞)을 지낸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정간공(靖簡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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