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신록(相臣錄)

 
충정공 한응인(忠靖公 韓應寅 : 明宗 9年(1554) ~ 光海君 6年(1614) 19世)
 공은 선조 때의 문신이요 원훈(元勳)이다. 자는 춘경(春卿)이요 호는 백졸재(百拙齋), 유촌(柳村)이다. 증 영의정 서원부원군 사직공 (司直公 : 敬男)의 아들로 증 좌찬성 호군공(護軍公 :  侑)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니 현감공(縣監公 : 萬鎰)의 따님이다. 선조 9년(1576)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 병과에 급제하여 부정자를 시작으로 주서, 감찰, 호조좌랑, 형조좌랑, 호조정랑, 인제현감,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고 홍문록에 피선되었다.
 선조 17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 해 황해도 경차관(黃海道 敬差官)으로 나갔는데 9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사직하고 상기(喪期)를 마친후 동왕 20년 성균관직강으로 복직하고 이듬 해 신천군수로 부임하여 동왕 22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謀反事件)을 적발한 공으로 호조참의가 되고 이어 승지가 되었다. 23년에는 평난공신 1등, 광국공신 2등에 녹훈되고 청평군(淸平君)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도승지에 특승(特陞)하였다.
 동왕 24년 10월에 진주정사(陳奏正使)로 명나라 조정(朝廷)에 들어가 일본의 도요도미(豊臣秀吉)가 명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니 길을 빌려달라고 망언(妄言)한 사실을 고하자 황제가 친히 황극전(皇極殿)에 나와 공을 인견(引見)하고 은근(慇懃 : 간절함)하게 위유(慰諭 : 위로하여 타이름)하는 그 음성(音聲)이 정녕(정녕 : 정성스러움)하였으며 공에게 후상(厚賞)과 칙서(勅書)를 내렸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과 일본이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던 것을 풀게 하였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많은 병력(兵力)을 파병한 것도 공의 공로가 크다 할 것이다.
 동왕 25년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개성에 이르자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만나 왕을 따라 다시 평양으로 갔다가 팔도 도순찰사(八道都巡察使)로 제수되어 임진강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가토(加藤淸正)의 유인작전에 속아 전군이 붕괴하자 왕을 뒤따라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하여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0월에 요동에 가서 원병을 청하자 순안사 낙상지(駱尙志)가 군병을 이끌고 오게 되어 함께 의주를 지키게 되었다. 11월에 형조판서에 제수되었고 12월에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왔을 때 공과 이덕형(李德馨)이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이여송을 맞이하였다. 공은 원래 한어(漢語)에 능하여 이여송과 일본정토사(日本征討事)에 대하여 불편함이 없이 논의(論議)할 수 있어 동왕 26년 평양성을 화공지책(化功之策)으로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서울이 수복(收復)되자 왜적이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친 것을 봉축(封築)하고 죽을 자를 조문하며 산 자를 위문하고 흩어져 있는 백골(白骨)을 엄매(掩埋 : 흙이나 덮어서 겨우 지내는 장사)하며 서적(書籍)을 구입 또는 수집하는 등 질서회복에 힘썼다.
  6월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사직하자 왕은 수차에 걸쳐 기복(起復 : 부모의 거상중에 벼슬길에 나감)토록 소명(召命 : 신하를 부르는 임금의 명령)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동왕 28년 상기를 마치고 호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세자책봉 주청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동왕 29년 평안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당시 평안도에 있던 많은 명나라 장병과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동왕 30년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또 병선 1만여 척에 병력을 이끌고 재침(再侵)하였고 명나라에서도 양호(楊鎬) 인솔하에 10만 대군의 원군이 왔다. 이때 호조판서에 제수되어 10만 대군의 군량미 보급에 전력하였다. 동왕 32년 우찬성 청평부원군에 오르고 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서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원군하여 준데 대하여 사례하고 돌아와서 형조,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그 뒤 좌참찬  이조판서  병조판서 또는 호조판서 등을 거쳐 동왕 40년(1607) 우의정에 올랐다. 그 뒤 수차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윤허치 않았다.  
 선조의 유교칠신(遺敎七臣)의한 분으로서 간신들의 간계(奸計 : 간사한 꾀)로 광해군 3년(1611)에 파직되고 동 5년에 삭탈관직 당하여 선영하에 돌아와 오직 선영만을 모실 뿐 두문불출하고 나라 일을 근심하며 지내다가 광해군 6년에 61세로 별세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다음 날 복관작(復官爵)되고 그 뒤 왕은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하며 특명으로 부조지전(不조之典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神主)를 영원히 사당(祠堂)에 모시고, 제사 지내게 하는 특전)을 명하고 시호를 충정(忠靖)이라 내렸다. 公은 초서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백졸재유고(百拙齋遺槁)》가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전주 이씨(全州 李氏)니 현감공(縣監公 : 聃齡)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3녀를 생육하니 장남은 동지돈녕부사 천녕군(淸寧君 : 德及)이요 차남은 세마공(洗馬公 :信及)이며 차는 판서공(判書公 : 仁及)이다.
 인조 5년(1627) 선조조의 원훈(元勳)으로 부조지전(不조之典) 특명 됨에 따라 동년에 건조(建造)하여 그 후 수차에 걸쳐 개보수(改補修)하고 현재에 이름. 인조 20년(1642)에 영의정 김류(領議政 金류)가 비문(碑文)을 지었고 공의 셋째아들 판서공 인급(判書公 : 仁及)이 비문을 썼으며 대사헌 김광현(大司憲 : 金光炫)이 전(篆)하여 근수(謹竪)하였다.좌의정 월사 이정구(左議政 月沙 李廷龜)가 공의 행장(行狀)을 오래전에 기록하였고 이를 12대손 준수(峻洙)가 써서 1988년에 후손들이 성의를 모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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