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신록(相臣錄)

 
문숙공 한익모(文肅公 韓翼모 : 肅宗 29年(1703) ~ 正祖 5年(1781) 25世)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부(敬夫), 호는 정현와(靜見窩), 진사공 증 영의정 사범(進士公 贈 領議政 師范)의 아들로 우윤공 증 찬성(右尹公 贈 贊成 : 配義)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기계유씨(杞溪愈氏)니 정랑공 명전(正郞公 命典)의 따님이다.
 영조7년(1731) 감제(柑製)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고 동왕 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후 예문관(藝文館),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등의 관직을 거쳐 외임을 청원하여 용강현령(龍岡縣令)에 나갔다가 동왕 20년 홍문관 응교(應敎)로 돌아와 승정원 승지(承旨)로 발탁(拔擢)되었고, 이어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이조(吏曹), 예조(禮曹), 병조(兵曹)의 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으며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낸 다음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동왕 29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에 승진되었고 예조, 병조참판(參判)과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였고 동왕 32년에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에 승진하였다.
 이듬 해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상기를 마치고 이조판서에 임명(任命)되었고 이어서 예조, 형조, 공조판서, 사헌부 대사헌과 의정부 좌우참찬(左右參贊) 등을 두루 거치면서 경연(經筵) 춘추관(春秋館), 세자빈객(世子實客),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의 제학(提學) 등 여러가지 직책(職責)을 겸임(兼任)하였다. 동왕 38년 판의금부사로 있을 때 나경언(羅景彦)이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고변이 있자 이를 사주(使嗾)한 배후를 철저히 규명할 것을 적극 주청(奏請)하였고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사도세자가 죽은 경위를 밝히는 교서(敎書)를 작성하라는 영조의 명(命)을 끝내 거절하여 삭탈관작 되었다. 그러나 그 뒤 공의 기개(氣槪 : 씩씩한 기상과 꿋꿋한 절개)가 높이 평가되어 동왕 42년 좌의정에 발탁되어 이때부터 동왕 51년까지 우의정 한 차례, 좌의정 다섯차례, 영의정 다섯 차례에 올랐다. 동왕 48년 기로소(者老所)에 들어가 누차 사직을 청원하였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조가 즉위하여 사도세자의 처벌을 주장한 홍인한(洪麟漢) 등을 국문할 때 병 때문에 나가지 못했는데 이에 불참한 죄로 풍천(豊川)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돌아와서 시골에서 지내다 동왕 5년(1781)에 별세하였다.
 공은 우리 한문(韓門)을 빛냈을 뿐만 아니라 숭조정신 또한 지극하였다. 영조 44년에 공이 좌의정으로 있을 때 직접 앞장서서 성금을 모아 시조부군의 묘비(墓碑)와 신도비문(神道碑文)은 공이 찬(撰)하여 세웠고 또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예빈경부군(諱光胤) 재각(齋閣)을 창건(創建)하고 위토(位土)를 증치(增置)하는 등 위선사에 많은 노력과 지성을 다하였다.
 배위 정경부인 기계 유씨(杞溪 愈氏)는 좌랑공(佐郞公 : 學基)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6녀를 생하니, 장남은 증 참판공(贈 參判公 : 好裕)이고 차남은 순창공(淳昌公 : 泰裕)인데 감역공(監役公 : 敬모)에게 입양되었으며 차는 승지공(承旨公 : 鼎裕)이다.

 位置 : 儀旺市 月岩里

 歲享日 : 陰10月 첫주 일요일

 
번호     이 름 조회
1 한악 3250
2 한상경 2711
3 한확 3064
4 한명회 3134
5 한백륜 2569
6 한치형 2622
7 한효원 3367
8 한효순 3598
9 한응인 2651
10 한흥일 3321
11 한익모 3501
12 한용구 2852
13 한계원 3557
14 한규설 330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