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신록(相臣錄)

 
익정공 한용구(翼貞公 韓用龜 : 英祖 23年(1747) ~ 純祖 28년(1828) 27世)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용구(用九), 자는 계형(季亨), 호는 만오(晩悟), 동지중추부사공 증 영의정(同知中樞府事公 贈 領議政 : 後裕) 아들로 대사헌공 증 찬성(大司憲公 贈 贊成 : 顯모)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는 문충공 익수(文忠公 : 翼洙)의 따님이다.
 영조 49년(1773) 증광 문과(增廣 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동왕 52년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었고 이어 예조좌랑(佐郞)이 되었다. 정조 11년(1787)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이듬 해 응교(應敎)에 제수되었다. 동왕 19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동왕 20년 이조참의(참議) 등을 거쳐 동왕 21년 형조참판(參判)에 승진하였다. 동왕 22년 평안도관찰사, 동왕 23년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 兼 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참판으로 있다가 공조판서에 승진하였다.
 순조 즉위년(1800) 정조대왕의 국장도감 제조(國葬都藍 提調), 동왕 원년 이조판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고 동왕 2년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동왕 4년 돌아와 예조판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지내다 동왕 5년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였다. 이듬 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옮겼다가 관직을 사퇴하였다. 동왕 9년 다시 관직에 나와 진하겸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동왕 12년 이후 여러 해를 좌의정에 있으면서 수차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국사(國事)가 어렵고 공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끝내 사퇴를 허락지 않을 정도로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동왕 21년 영의정에 승진하였으나 이듬 해 연로(年老)하다는 이유로 사퇴하고영중추부사로 옮겼다. 입기사(入耆社) 후 향년 82세에 영면(永服)하니왕이 부음을 듣고 애석(哀惜)해 하며 부의(賻儀)를 후하게 내리고 두차례에 걸쳐 승지와 궁관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였다. 시호는 익정(翼貞)이다.
 공은 정조 17년(1793) 양절공(襄節公 : 諱 確)의 신도비대석(神道碑臺石)을 보수(補修)할 때 발기인 중의 한 분이고  순조 2년(1802)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예빈경부군 광윤(禮賓卿府君 諱光胤)의 제수(祭需)에 만금(萬金)을 내어 더욱 풍성(豊盛)하게 조력(助力)하였으며 제학공부군(提學公府君 諱 謝奇)의 산소를 영광(靈光), 나주(羅州) 양군수를 시켜 찾게 하여 개봉축하고 산지기로 하여금 수호(守護)토록 하였고 동왕 4년 사숙공(思肅公 : 諱 渥)의 묘소 중심 수호(基所 重尋 守護)할 때에도 발기인중의 한분으로서 묘갈(墓碣),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등을 갖추어 세우고 묘소도 개봉축(改封築)하는 등 숭조정신에 있어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극진한 분이다.
 배위는 세 분인데 초배 증 정경부인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동지돈녕공(同知敦寧公 : 明中)의 따님이고 계배 증 정경부인 충주 이씨(忠州 李氏)는 희눌(希訥)의 따님이며 삼배 증 정경부인 파평 윤씨(坡平 尹氏)는 심정(心靖)의 따님이고 부실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무자 4녀로 조카인 판관공(判官公 : 景履)을 계후 입양하였으나 공보다 11년 앞서 동왕 17년에 졸하니 판관공도 자녀가 없어 8살된 정교(正敎 : 후에 숭정대부 판의금부사 효정공)를 판관공 후로 계후입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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