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신록(相臣錄)

 
참정공 한규설(參政公 韓圭卨 : 哲宗 7年 ~ (1856~1930) 29世)
 공(公)은 조선 말기(末期)의 무신으로 애국지사(愛國志士)이다. 생부(生父)는 승렬(承烈)이고 휘(諱)는 규설(圭卨), 자(字)는 순우(舜佑)이고 호(號)는 강석(江石)이다. 서울 출신이며 부사공 승열(府使公 承烈)의 둘째 아들이고, 절제공 의식(節制公 義植)의 손자이며,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의 15대손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해주 오씨(贈 貞敬夫人 海州 吳氏)로 부총관 치현(副摠管 致賢)의 따님이다.
 공은 철종(哲宗) 7년(1856) 생이고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28세에 진주병사에 발탁되었다. 고종(高宗) 20년(1883) 전라좌수사가 되고이듬 해 경상우병사, 1885년 금군별장(禁軍別將)을 거쳐 우포장(右捕將)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던 유길준(兪吉濬)을 연금형식으로 보호, 그로 하여금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 완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뒤 친군우영사(親軍右營使), 상리국총판(商理局 總辦), 기기국총판(機器局 總辦)을 거쳐 1887년 형조판서, 이어 한성부판윤에 개임되었고, 그 뒤 다시 우포장,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친군장위사(親軍將衛使), 연무공원 판리사무(鍊武公院 辦理事務)를 차례로 역임하고, 1894년 총어사(摠禦使), 1896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에 임명되어 사법집행의 공정을 기하려고 노력하였다. 독립협회(獨立協會)가 결성되자 그 활동에 호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1898년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열기가 고조되는 속에 중추원 의장(中樞院 議長)에 임명되고, 다시 법부대신으로서 고등재판소재판장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이듬 해 정부의 탄압으로 만민공동회의 기세가 꺾이자 독립협회는 해산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본직에서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 特進官)에 이어 이듬 해 다시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찬정을 거쳐 1905년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각하였다. 이 해에 일제가 전권대사 이토(伊藤博文)를 앞세워 을사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끝까지 앞장서서 이를 반대하였고, 일제의 갖은 협박에도 굽히지 않자 결국 대궐 수옥헌(漱玉軒) 골방에 감금당한 채 본관(本官)을 면직 당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곧 징계에서 풀려나 중추원 고문,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고, 일제에 의한 강제 국권피탈 후에는 일본 정부로 부터 남작(男爵)의 작위가 주어졌으나 받지 않았다. 이 후 칩거생활을 하다가1920년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창립하고 이를 민립대학 기성회(民立大學 期成會)로 발전시켰다. 1930년 9월 18일 83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 정경부인 밀양 박씨(貞敬夫人 密陽 朴氏)는 참판 규희(參判 珪熙)의 따님이고 아들은 비서승 양호(秘書丞 亮鎬)이고 형은 충숙공 규직(忠肅公 圭稷)이다.
공(公)의 배 정경부인 밀양 박씨(配 貞敬夫人 密陽 朴氏)는 1950년 3월 25일 졸하니 원흥동 신좌(元興洞 辛坐) 공며에 합조(合兆)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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