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군계(西原君系)


양절공 한확(襄節公 韓 確 : 정종 2년(1400 ~ 세조 2년(1456) 13世)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증 영의정 순창공(淳昌公 : 永정)의 아들로 증 판서 녹사공(錄事公 : 寧)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의성 김씨(義城 金氏)는 의성군(義城君)인 양소공(襄昭公 : 英烈) 의 따님이다.
 태종 18년(1418) 공의 나이 19살 때 명황제의 소명(召命)을 받고 명나라에 들어가 봉의대부 광록시소경(奉議大夫 光錄寺少卿)에 제수되었다. 때마침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게 되자 명조(明朝 : 명나라 조정)에서 이를 책봉(冊封)하는 명 황제의 정사(正使) 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오니 온나라가 공의 풍채(風采 : 인품)를 선망(羨望 : 부러워함) 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17년(1435) 자헌대부 중추원부사, 동왕 21년 한성부사, 경기도관찰사, 정헌대부중추원사, 동왕 22년 병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동왕 25년 동지중추원사, 한성부판윤, 동왕 26년 다시 병조판서 겸 지중추원사, 동왕 27년 이조판서, 동왕 28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평안도 관찰사로 평양판윤과 평안도 병마도절제사까지 겸임하여 문무관직을 통할(統轄)하였다.
 동왕 32년 문종이 즉위하자 판중추원사로 소환(召還)되었고 문종 2년(1452)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단종 원년(1453) 정란공신(靖難功臣)으로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탁승(擢昇 : 발탁하여 승진시킴)되었으며 세조 즉위 초에 좌의정에 승진, 좌익(左翼)공신 호를 내리고 서성부원군을 서원부원군으로 개봉 (改封)하였다.
 세조 원년(1455)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북경(北京 : 명나라 수도)에 들어가 사명 (使命)을 완수하고 동왕 2년 환국 도중 단주 사하역(湍州 沙河驛)에서 원로 피로(遠路 疲勞)에 의한 병환으로 여사(旅舍)에서 별세(別世)하였다.
 세조는 3일간의 조례(朝禮)를 철폐하여 애도(哀悼)의 뜻을 표하며 부의(賻儀)를 하사 하고 예관을 파견하여 영구(靈柩 : 시체를 넣은 관)를 맞이하도록 하고 당시 도승지(忠成公 韓明澮)에게 하명하여 호상일체(護喪一切)를 관장케 하여 예장(禮葬)하고 시호를 양절(襄節)이라 내렸다. 그 뒤 부조지전(不조之典)의 특전을 내리고 성종 원년(1470) 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동왕 2년 선세자를 덕종대왕(德宗大王)으로 세자빈 한씨(韓氏)를 소혜왕후(昭惠王后)로 추존(追尊 : 사후에 존호를 올림)함에 따라 공은 왕비의 아버지이므로 국구(國舅)로 추봉(追封)되었다.
 배위는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니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문양공 여방(文良公 : 汝方)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 6녀를 낳으시고 장남은 공안공(恭安公 : 致仁)이요 차남은 장도공(章悼公 : 致義)이며 3남은 장간공(莊簡公 : 致禮)이다. 1녀는 첨지중추부사공 이계녕(李繼寧), 2녀는 계양군(桂陽君 증), 3녀는 현령공 (縣令公 : 金自琓), 4녀는 동지중추부사공 최 정(崔 정), 5녀는 사직공(司直公 : 權輯)에게 각각 출가하고 6녀는 덕종대왕비인 소혜왕후(昭惠王后)이시다.
 부실(副室)에서 6남을 낳으니 장남 은 사직공 류산(榴山), 2남은 어모장군공 유산(柚山)이고 3남은 어모장군공 감산(柑山)이며 4남은 시산(枾山), 5남은 이산(梨山), 6남은 사과공 도산(桃山)이다. 모두 명나라에서 성장(成長)하다가 우리나라에 와서 벼슬까지 올랐으나 다시 명나라에 돌아가 그 후손들이 중국에 살고 있다고 전하여 온다.
 
 位置 : 南楊州市 鳥安面 陵內里
 歲享日 : 寒食日 秋夕節 忌祭祀
 
증 남양부부인 홍씨(贈 南陽府夫人 洪氏 : 태종 4년(1404)~세종 32년(1450))
 부인(夫人)은 양절공(襄節公 : 韓 確)의 배위(配位)이다. 성(姓)은 남양 홍씨(南陽 洪 氏)이니 명성(名聲)이 높은 가문(家門)이다. 고려조 때부터 대대(代代)로 공경 재상(公卿 宰相 : 고위 고관과 제왕을 도와 정무를 총리하는 대신)이 이어져 왔고 도덕(道德) 과 문장(文章)이 당대(當代)에 제일 높았던 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堤學) 문양공 여방(文良公 汝方)의 따님으로 조선조 개국공신(朝鮮朝 開國功臣)이요 남양군(南陽君)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堤學)문경공(文景公 : 吉旼)의 손녀이며 부윤공(漢陽府尹 : 鄭符)의 외손녀다.
 부인은 나면서부터 자질(資質)이 범인(凡人)들과는 특이(特異)하고 어려서부터 안색 (顔色)이 온화(溫和)하고 기품(氣品)이 유순(柔順)하며 장성(長成)해서는 언어(言語)가 과묵(寡默 : 침착하고 말이 적음)하고 행동이 근엄(謹嚴 : 조심스럽고 엄숙함)하며 부모에게도 혼정신성(昏定晨省 : 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핌)과 동온하정(冬溫夏정 :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서늘하게 한다는 말)하는 효도(孝道)에 태만함이 없었으며 스승의 교훈(敎訓)을 받지 않고도 일거일동(一擧一動)이 예절(禮節)에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문양공이 사랑하고 귀중(貴重)하게 여기더니 양절공의 배위가 되었다.
 오한(吾韓)에 오시어 공순(恭順)하고 근검(勤儉 : 부지런하고 알뜰함)하게 처신(處身)하고 구고(舅姑 :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기며 제사(祭祀)를 받드는데 존경(尊敬)과 정성(精誠)을 극진(極盡)히 하고 친척간에 화목하며 노비(奴婢)를 은애(恩愛)로써 거느리고 자녀(子女)들로 하여금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겸비(兼備)한 인품(人品)으로 성장(成長)하도록 교훈(敎訓)하였다. 양절공께서 소시(少時)에 명나라 조정(朝廷)에서 광록시소경(光錄寺少卿)이란 벼슬을 받고 황제(皇帝)의 부름을 받고 여러 차례에 걸쳐 명나라 서울에서 체류(滯留 : 머물러 있음)한 바 있었으나 가정사(家庭事)에 구애(拘의 : 거리낌)됨 없이 지낸 것은 부인께서 내조(內助)의 임무(任務)로 제반가사 (諸般家事)를 능숙(能熟)하게 처리(處理)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양절공이 대단히 애경(愛敬)하였다.
 불행하게도 미미(微微 : 작은 모양)한 병환(病患)으로 인하여 별세하니 향년(享年)이 47이다.
 성종 2년(1471) 선세자(先世子)를 덕종대왕(德宗大王)으로 세자빈 한씨(韓氏)를 소혜왕후(昭惠王后)로 추존(追尊)함에 따라 왕비의 어머니가 되므로 남양부부인(南陽府夫人)으로 추봉(追封)하고 남양군을 남양부(南陽府)로 승격(昇格)시켰다.
 슬하에3남6녀를 생육(生育)하였다.
 연산군 3년(1497) 3월 16일 판돈녕부사 서릉군(西陵君 諱 致禮)께서 인수대비(仁수大妃)의 명(命)을 받들어 임사홍(任士洪)으로 하여금 비문(碑文)을 짓고 병서(竝書)토록 하여 같은 해 6월에 세웠다.
 우리나라 여성(女性)의 신도비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位置 : 楊州君 隱懸面 龍岩里
 歲享日 : 寒食, 秋夕, 忌祭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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