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간공계(平簡公系)

 
문양공 한계미(文襄公 韓繼美 : 1421~1471 14世)
公의 諱는 繼美요 字는 공보(公甫)이니 함길도 관찰사 혜(咸吉道 觀察使 惠)의 아들 이요 太宗 때 영의정(領議政) 상경(尙敬)의 손자로 세종 신축(世宗 3年 辛丑 : 1421) 5月 27日 生이다.
 公이 18세에 공신(功臣)의 아들로 충의위(忠義衛)가 되어 부사직(副司直)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겸하였다. 형조 도관좌랑(刑曹 都官佐郞)이 되었을 때 明나라 사신의 수행을 했고 사복시(司僕寺) 소윤(小尹)을 거쳐 세조 즉위(世祖 卽位)때 좌익공신 (佐翼功臣)이 되어 左右承旨를 역임하고 이어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서원군(西原君)이 되었다.
 1461년에 平安, 黃海, 江原道 안집도 순찰사(安集都 巡察使)로 임명되고 1463년에 돌아와서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 吏曹判書)가 되었다. 1465년 정헌대부 사복시정 (正憲大夫 司僕寺正)이 되어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總府 都總管)으로 옮겼고 1467년에는 숭정대부 평안도 병마수군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崇政大夫 平安道 兵馬水軍 節度使 兼 寧邊大都護府使)가 되었다.
 이는 地理的으로 명(明)나라와 접해 있고 산적(山賊)들이 출몰(出沒)하는 험지(險地) 이므로 위중대신(威重大臣)으로 보임(補任)한 것이다. 이 해에 이시애(李施愛)가 반란 (叛亂)을 일으켜 함경도(咸鏡道)가 병란(兵亂)에 휩싸이자 公이 스스로 6천 기(六千騎 : 말탄병사 6천명)를 모아 반란군(叛亂軍)을 격퇴(擊退)하였다.
 그 공(功)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을 삼고 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崇祿大夫 議政府 右贊成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을 제수(除授)하고 부친(父親 : 惠)은 순충적되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예문춘추관홍문관관상감영사세자시강원사서원부원군(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藝文春秋館弘文館觀象監領事世子侍講院師西原府院君)에 추증(追贈)하였으며 公의 配位 城平 尹氏는 安城郡夫人을 封했다.       1469년에 보국승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이조판서(輔國崇綠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吏曹判書)가 되고 1471년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策封)되어 순성명양경제(純誠明亮經濟)라는 호(號)가 하사(下賜)되었고 이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1471년 12월에 公이 51세에 하세(下世)하니 조정(朝廷)에서 하룻동안 정사(政事)를 휴무하고 상장(喪葬)을 갖추어 다스리게 하고 문양(文襄)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리고 다음 해 1472년 12월에 사패지지(賜牌之地 : 나라에서 내린 땅)인 現在의 墓域에다 禮에 따라 安葬하였다.
 配位인 貞敬夫人 封安城郡夫人 坡平 尹氏와 合폄이다. 墓 의 封墳에는 本來 護石이 없었으나 現世에 와서 이미 오래 전에 잃었던 長明燈復元과 함께 이룩한 것이고 長台石도 一 部 改石한 것이다. 墓祀는 寒食節과 秋夕節에 奉行한다.
 
 位置: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시묘동)
 
公의 眞影은 壬辰倭亂 時에 祀宇와 함께 燒失되어 1982년(壬戌)에 王朝實錄, 政院日記, 輿地勝覽 肖像大典 等에서 考證하여 秋峯 金進龍 畵伯이 摹寫하여 奉安하였다.
 公의 祀宇인 文襄祀는 永世不桃廟이나 壬亂때 燒失되어 位牌는 그동안 宗孫의 家廟 에 奉安하여 오다가 1980년 9월에 重建하여 移侍奉安하고 있으며 廟祀는 文襄公 忌日 인 음 12월 23일과 配位 尹氏의 忌日인 음 9월 23일에 奉行하며 正月初一日에는 茶禮 를 드린다.
 碑面刻 上部에 두른 篆에는 墓碑銘이라고 되어 있고 이 碑文은 영산부원군 김수온(永山府院君 金守溫)이 撰하여 墓下階左側에 세웠던 것을 이곳에서 百步쯤 直方向 下側에 옮긴 것이다.  齋室앞 언덕에 새로 세운 碑는 當碑가 風磨雨洗하여 字劃을 分看하기 어려워서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公은 용모가 괴위(魁偉 : 체격이 크고 훌륭함)하고 기우(氣宇 : 기개와 도량)가 관홍(寬弘 : 마음이 너그럽고 큼)하였으며 말과 웃음은 많지 않았으나 대인(對人)에는 늘 화기(和氣)가 감돌아 환심을 샀다고 한다.
 11세 때 부친이 별세(別世)하여 어머님의 영(令)을 어김이 없었고 형제(兄弟)가 우애(友愛)하였으며 친척과는 돈목(敦睦)하게 지냈다. 지위(地位)가 있어도 교만하지 않았고 전형(銓衡 : 吏曹判書)을 두 번이나 했어도 항상 공평하게 인사(人事)를 처리하여 칭송을 받았다. 지방관장(地方官長 : 평안, 황해, 강원(平安, 黃海, 江原))을 맡고는 토지를 개간케 하고 제방을 쌓고 도랑을 쳐가며 농사가 풍년들게 하여 고향을 떠났던 유민(流民)들이 돌아오니 수만(數萬)에 이르렀다. 平生에 집안일을 염려해 본 일이 없고 王이 國事를 처리함에 있어 公에 의지함이 많았으니 公은 충국대신(忠國大臣)이라 하였다. 명(銘)에서 공훈(功勳)이 혁혁(赫赫)하여 선친(先親)도 몽은(蒙恩)하고 황무지 (荒蕪地)를 개간(開墾)하여 民生을 도왔으며 公事에 臨하여는 德으로 다스리니 훌륭한 명망(名望)은 千年토록 傳하리라 했다.
 本來 재실(齋室)은 종가(宗家) 별채를 썼으나 이 별채와 宗家 全體가 철물(鐵物)을 일체(一切) 쓰지 않고 순수한 木材에 싸리나무 못을 主針으로 한 평가초개(平家草蓋) 건물로 500여 년을 손색없이 문화재(文化財)로서의 가치(價値)가 높은 유물(遺産)이었으나 현세인(現世人)의 무지(無知)로 철거한 자리에 1980년 9월에 신축하여 현재에 이른다.
 
파평 윤씨 묘지(城平 尹民 基誌)
 城平 尹氏는 西原府院君 文襄公(韓繼美)의 배위(配位)이다. 고려 중엽(高麗 中葉)에 시중(侍中)에 올라 地方을 토평(討平)하여 큰 공(功)을 세운 윤 관(尹 瓘)의 12대 손녀(孫女)로 증영의정부사 영경연서운관사(贈 領議政府事 領經筵書雲觀事)를 지낸 정정공(貞靖公) 번(번)의 따님인데 세조대왕비(世祖大王妃) 정희왕후(貞憙王后)의 여형(女兄 : 언니)이다. 이 지석(誌石)은 묻은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묘역 개사초(墓域 改莎草) 시에 묘정(墓庭)에서 출토(出土)된 것으로 보면 도굴(盜掘)하다가 떨어뜨린 지석편(誌石片)으로 짐작된다.
 城平 尹氏는 文襄公의 地位에 따라 貞敬夫人에다 安城郡夫人이 封해졌다.
 
 문양공 한계미(文襄公 韓繼美)에게 내린 단서철권교지(丹書鐵券敎旨) 해석문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신하(臣下)된 자 정성을 다하여 제왕(帝王)을 보위하고 덕을 높이면 그 공을 보답하는 것이니 이는 국가의 떳떳한 경륜이요 고금을 통한 의리이다.
 오직 경(卿)의 도량(度量)이 하해(河海)를 안은 듯하고 성품(性品)은 충양(忠良)을 온포(蘊泡 : 가슴속에 재주를 품음)한 것 같이 일찍이 향화지성(向化之誠)을 기울였으며 나라 지키는 데에 계속한 정성은 과인이 실로 소중히 여기는 바다.
 어느 날 적신(賊臣) 이시애(李施愛)가 역적을 모의, 장재(將宰)를 살해하고 사졸을 구류하며 군사와 함께 발호(跋扈 : 제 멋대로 날띔)하여 죄가 충천하거늘 특별히 귀성군(龜城君)이 준(浚)과 제장을 파견하여 토벌하니 경(卿)과 선산군(善山君) 김교(金嶠) 가 합심하여 추적(추賊)하는데 먼저 삼군기병(三軍奇兵)으로 출동하여 대첩(大捷)하니 원흉(元兇 : 李施愛)의 머리를 베어 삭방(朔方)이 평정되었다.
 그 공이 심히 크므로 과인이 그 공훈을 못잊어 경(卿)에게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에 책(策)하고 각(閣)을 세우고 영정(影幀)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록하고 그 부모처자(父母妻子)에겐 삼계위(三階位)를 올리고 적장자(嫡長子)는 대대(代代)로 그 녹(綠)을 계속 주며 자손(子孫)은 적개이등공신 한계미(敵愾二等功臣 韓繼美)의 후손으로 비록 죄(罪)가 있어도 영세(永世)토록 사죄(赦罪)한다 하고 아울러 반당 칠인(伴당 七人 : 從者), 노비 십구(奴婢 十口), 구사 오구(丘史 五口 : 官奴), 전 팔십결(田 八十結), 은 삼십량(銀 三十兩)의 일습(衣 一襲), 안구내구마 일필(鞍具內廐馬 一匹)을 줄 것이요 자손이 없는 자가 있으면 생질여서(甥姪女壻)에게도 일계위(一階位)를 가작(加爵)할 것이며 같은 공이 있는자는 후에 병록토록 하라 기록하였다. 어희라(슬프도라). 산하에 맹세코 그 꽃다운 이름과 그 업(業)은 후손에게 전하여 무궁토록 하라 하고 이에 교시(敎示)를 내려 그 공을 다 알게 하노라.
 
성화삼년(成化三年 1467)10월 일

 
번호     이 름 조회
1 한란 3965
2 한악 2912
3 한대순 2958
4 한공의 2806
5 한방신 3881
6 한수 2753
7 한리 2585
8 한상경 2746
9 한확 3949
10 한명회 4214
11 한명진 2630
12 한계미 2755
13 한계희 3806
14 한계순 3915
15 한백륜 2967
16 한종손 3361
17 한치인 3175
18 한치의 2993
19 한치례 2606
20 한치형 2743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