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간공계(平簡公系)

 
문정공 한계희(文靖公 韓繼禧 : 세종(世宗) 5年(1423)~성종(成宗) 13년 (1482) 14世)
공(公)은 조선 초기(朝鮮 初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계희(繼禧)이고 字는 자순(字順)이다.함길도 관찰출척사(咸吉道 觀察黜陟使)를 지낸 청산군 혜(淸山君 惠)의 셋째 아들이고 조선(朝鮮)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간공 상경(文簡公 尙敬)의 손자이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창녕 성씨(贈 貞敬夫人 昌寧 成氏)는 양혜공 달생(襄惠公 達生)의 따님이다.
 공(公)은 세종(世宗) 5년(1423)에 태어났으며 세종(世宗) 23년(1441)에 진사(進士)가 되고 세종(世宗) 29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숭문원 정자(崇文院 正字)에 보임(補任) 되었다가  집현전 정자(集賢殿 正字)에 뽑혀 경연관(經筵官)을 겸(兼)하였다. 세종임금이 장서각(藏書閣)을 세우고 중국(中國) 등 사방 각처(四方 各處)에서 양서(良書)를 수집(蒐集)하여 비치(備置)하니 공(公)이 빠짐 없이 다 읽고 머리 속에 넣고 다니니 사람들이 탄복(歎服)하고 당태종(唐太宗)의 비서 우세남(秘書 虞世南)과 같다 하여 세남비서(世南秘書)라 칭(稱)하기도 하고 걸어 다니는 비서(秘書 : 國家에서 가장 아끼는 所重한 冊 또는 書類를 稱함)라고도 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 에 세조(世祖)가 문종(文宗)께 말씀드리기를 '계희(繼禧)가 경서(經書)에 밝고 처신(處身)을 잘하여 당대(當代)에 견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고 적고 있다. 1455년 세조(世祖)가 왕위(王位)에 오르자 잠저(潛邸) 때부터  공(公)의 학문(學問)과 인품(人品)을 인정해 보도교수 겸 우문학(輔導敎授 兼 右文學)을 제수 받고 세자(世子)인 덕종(德宗)에게 경학(經學)을 가르쳤다.
 이어 좌필선(左弼善)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를 거쳐 세조(世祖) 2년 정축(丁丑)에 예문관 직제학 겸 지제교(藝文館 直提學 兼 知製敎)와 세자우보덕 겸 춘추관 기주관(世子右輔德 兼 春秋館 記注官)으로 옮기고 예종(睿宗)이 세자(世子)로 책봉(冊封) 되자 다시 내전(內殿)에서 세자(世子)를 가르쳤다. 1458년 무인(戊寅)에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고1460년에 우승지(右承旨)로 옮겼다가 가선대부 공조참판 겸 중추원부사(嘉善大夫 工曹參判 兼 中樞院副使)가 되고 1462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세자우빈객(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世子右賓客)이 되고 이때 흥천사 신종명(興天寺 神鍾名)을 지었다.
 1463년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고 1465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세자좌빈객(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世子左賓客)에서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1466년 선부(選部)를 관장하시며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고 146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공(公)은 임무(任務)를 행(行)할 때 공정무사(公正無私)하여 청백(淸白)을 보전(保全)하고 늘 겸양(謙讓)하여 일체(一切) 모나는 일이 없었고, 대사(大事)를 처리(處理)함에도 정확(正確)하여 아무도 이의(異議)나 시비(是非)를 걸지 못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공(公)에 대하여, 세조(世祖)를 만나 은총(恩寵)이 극진(極盡)하였으나 마음이 늘 유백(愈白)하고 지위(地位)가 높되 의지(意志)를 더욱 낮추어 임금이 후대(厚待)하고 위로(慰勞)함이 더 하였으며 명예(名譽)와 절조(節操)에 힘써 시종여일(始終如一)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젊어서 집현전(集賢殿)에 있을 때 동료(同僚)들이 서로 말하기를 성인(聖人)이라는 분을 우리가 만나 보지 못했지만 한공(韓公) 같은 이가 비슷하지 않겠느냐며 어려워하고 존경하였다 한다. 1468년 세조께서 병(病)이 위독해지자 급(急)하게 공(公)을 내전(內殿)으로 부르시어 독대(獨對)를 한 자리에서 세자(世子)에게 왕위(王位)를 물려 주려한다 하여 공(公)이 적극(積極) 만류하였으나 재차(再次) 명(命)하여 대보(大寶)와 곤면(袞冕)를 세자(世子)에게 전수(傳受)하는 일을 주관(主管)하게하였다. 1469년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남이(南怡) 등의 모반(謨反) 사건(事件)을 다스린 공(功)으로 추충정난 익대공신(推忠定難 翊戴功臣)에 책록(策錄)되고 서평군(西平君)에 봉(封)하여 졌다.
 그리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예종(睿宗)의 상빈(上賓)이 되고 성종(成宗)이 즉위(卽位)하니 책훈(策勳)이 되어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兼)하고 영릉(英陵) 보호사찰(保護寺刹)로 신륵사(神勒寺)를 중창(重創)하여 보은사(報恩寺)로 개명(改名)하는데 도제조(都提調)로 참여(參與)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찬술(纂述), 간행(刊行)에 제조(提調)가 되었다.
 1470년 낙산사기(落山寺記)를 지었으며 1471년 성종(成宗) 2년에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 佐理功臣)에 책록(策錄)되었으며  이후 간경사업(刊經事業)에 중심이 되어 능엄경(楞嚴經), 법화경 육조해(法華經 六祖解), 금강경 삼가해(金剛經 三家解), 원각경 심경(圓覺經 心經), 영가집(永家集) 등의 경인 보급(經印 普及)에 진력(盡力)하였다.
 공(公)의 가문(家門)은 조선 초기(朝鮮 初期)의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서  가문(家門)의 배경(背景)보다는 세종(世宗) 때 집현전(集賢殿) 장서각(藏書閣)에 상주(常駐)하다시피 하면서  박람강기(博覽講記)로 쌓은 학식(學識)이 큰 바탕이 되었다. 풍부(豊富)한 학식(學識)과 단정(端正)한 성품(性品)은 주위(周圍)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특(特)히 서거정(徐居正)과 교분(交分)이 두터웠다.
 공(公)이 병(病)에 걸려 여러 차례 위독(危篤)하자 성종(成宗)이 걱정하여 손수 기도문(祈禱文)을 지어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빌어 주고 병이 낫자 불러들여 '경(卿)은 나의 마음을 불쌍히 여겨주오. 나는 경(卿)의 얼굴을 불쌍히 여기오. 내가 병이 들었을 때 경(卿)이 나를 도와 주었으므로 경이 병들었을 때 나도 걱정이 되오. 걱정이 지나쳐 경의 이름을 듣기 싫을 정도였는데 오늘 뜻밖에 경(卿)의 얼굴을 보게 되어 대단히 기쁘오' 하였다.
 성종(成宗)은 공(公)의 청백리(淸白吏) 지정(指定)을 권유(勸誘)하였으나 받지 않았으며, 흉년(凶年)에 백성(百姓)들은 한 끼도 못 먹는데 내 어찌 세끼를 다 먹을 수 있으리오 하고 조석(朝夕) 두 끼만 식사(食事)하는 것도 밥과 죽(粥)으로 연명(延命)하였다. 그리하여 대소일가(大小一家)가 모여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제안(提安)으로 문서(文書)를 작성(作成)하여 흥인문(興仁門) 밖 고암리(鼓岩里 : 現 安岩洞 高麗大 近處) 논 10섬지기를 억지로 받게 하였는데 논은 받았으나 이 곳에서 나오는 소출(所出)은 집에 못들어 오게 하고 인근에 가장(家長)이 병든 집이나 가난한 선비, 과부,고아 등 살림이 어려운 집에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공(公)의 뜻이 유업(遺業)으로 가문(家門)에 계승(繼承)되어 인근(隣近)이 편안히 살게되어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이름을 편안할 안(安)자로 바꾸어 현재도 안암동(安岩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공(公)은 일품(一品)의 지위(地位)에 있으면서도 궁색(窮塞)하기가 극(極)에 달하여 자녀의 혼수걱정을 하였으며, 집에는 언제나 책만 가득하였고 공(公)의 책 읽는 소리만 들릴 뿐 항상 조용하였다 한다.                            
 성종(成宗)은 공에게 사패지(賜牌地)를 내리려 하였으나 극구(極口) 사양(辭讓)하고 서평군(西平君)의 봉작(封爵)도 사양하였으나 가납(可納)되지 않았다. 성종(成宗)의 끈질긴 사패지(賜牌地)   하문(下問)으로 말년(末年)에서야 굳이 묻힐 자리를 주신다면 대왕(大王)의 태실(胎室) 옆 한자리를 주심이 어떻겠느냐고 말하니 성종(成宗)은 쾌(快)히 응낙(應諾)하고 태실(胎室)을 광주군 태전리(廣州郡 胎田里)로 옮기고 율리(栗里:現城南市 栗洞) 일대(一帶)를 사패지(賜牌地)로 내려주어 현재(現在)의 능침(陵寢) 자리에 묻힐 수 있었다.
 공(公)은 자손들에게 내가 죽거든 나라에서 내리는 예장품(禮葬品)은 일체(一切) 받지 말라고 한 유언(遺言)이 있었으니 청백리(淸白吏)의 표상(表象)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성종(成宗) 10년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이 되어 성종(成宗)이 선정치민(善政治民)하는데 정치(政治)의 중심이 되었다. 성종(成宗) 13년(1482) 윤(潤) 8월 19일 향년(享年) 60세로 졸(卒)하니 성종(成宗)은 조회(朝會)를 사흘간 폐(閉)하고 극진(極盡)한 예우(禮遇)로 장사(葬事)토록 하고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시 문정공(贈 大匡補國 崇錄大夫 議政府 領議政 諡 文靖公)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배위(配位) 정경부인 함양 여씨(貞敬夫人 咸陽 呂氏)는 좌랑 계(佐郞 稽)의 따님이다. 아들은 서천군 사문(西川君 斯文), 판관 사무(判官 士武), 현령 사신(縣令 士信), 부사 사개(府使 士介), 사수(士粹), 사준(士俊)이다. 고종(高宗) 9년(1872) 부조 지전(不조 之典)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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