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군계(西原君系)

 
질경공 한치형(質景公 韓致亨 : 세종 16년(1434) ~ 연산 8년(1502) 14世)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통지(通之), 시호는 질경(質景), 정랑공(正郞公 : 질)증 영의정의 아들로, 순창공(淳昌公 : 永정) 증 영의정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한양 조씨(漢陽 趙氏)는 도총제공(都摠制公 : 敍)의 따님이다. 문종 1년(1451) 호위청 기사(扈衛廳 記事)로 음보된 뒤 직장, 감찰, 지평, 장령, 소윤, 판결사, 승지, 참판, 동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종 2년(1471)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으며 형조판서에 승진되었다. 그 뒤 개성부유수, 경기도관찰사, 한성부판윤, 도총관, 공조와호조, 병조 판서, 판의금부사, 평안도 관찰사, 좌우참찬과 찬성을 역임하였고 연산군 2년(1496) 우의정에 올라 동군 4년 좌의정, 이어 동군 6년 영의정까지 올랐다. 동군 8년 천수(天壽 : 타고난 목숨)를 다하니 모든 백성들의 애도(哀悼 : 사람의 죽음을 서러워함)속에 예장(禮葬 : 국장)하고 나라에서 시호를 질경(質景)이라 내렸다.
 성종 때에 주청사(奏請使), 성절사(聖節使), 사은사(謝恩使)등으로 다섯 차례나 명 나라에 다녀오고 명 황제로부터 정一품만이 차는 서대(犀帶 : 물소의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를 하사받았으며 명나라와의 외교에 많은 공(功)을 세웠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의 명절과 경사 때마다 사신을 보내고 그때마다 금은보화(金銀寶貨)와 인삼(人參), 호피(虎皮) 등 심지어는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까지도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많은 공물(貢物)을 바쳐왔다.
 이로 인하여 나라의 재정과 백성들의 생활고는 도탄(塗炭 : 몹시 곤란함)에 빠질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명 황제에게 이 실정을 설명하고 공물을 감소(減少 : 줄여 적게 함)하여 줄 것을 상소하여 그 뒤부터는 절반 이하로 감소되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폭정이 시작되자 그 일거일동에 대하여 수시로 충간(忠諫 : 충성을 다하여 간함)하고 무능 또는 신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코자 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 뒤 공과 좌의정 성준(成俊), 우의정 이극균(李克均) 등 공동 명의로 낸 《10조 상소문》을 비롯하여 수백 차례 충간하였으므로 연산군도 감히 폭정하지 못하고 멈추거나 주저하다가 공이 돌아가자 이때부터 폭정이 더욱 심하였고 공이 자기의 의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불충(不忠 : 임금을 배반함)한 자로 몰고 또 자기의 생모 윤비(尹妃)를 폐출시킨 모의에 가담하였다고 허구(虛構 : 사실이 없는 일을 얽어 만듦)하여 삭탈관직과 일가가 몰살 당하는 등 불행한 일을 당하였으나 중종반정 즉시 중종은 공을 복관작하고 부조지전의 특명을 내렸다.
 공은 홀로 되신 어머니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왕으로부터 누차 포상을 받은 바 있다.
 배위는 두 분인데, 초배(初配)정경부인 완산 이씨(完山 李氏)는 양녕대군 제(讓寧大君 : 시)의 따님이고 계배(繼配) 정경부인 단양 우씨(丹陽 禹氏)는 부사공(府使公 : 延)의 따님인데 두 분 다 자녀를 못 낳고 부실(副室)에서 아들 사자(獅子)가 있다. 고로 황간공(黃潤公 : 迹)을 계후입양하였다.
 
 所在地 : 楊州郡 長興面 三上里
 歲享日 : 春秋節祀 및 陰 10月 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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