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향록(철享錄)

 
충의공 한온 (忠毅公韓 蘊 : 1511∼1555 17世)
公의 휘(諱)는 온(蘊)이요, 자(字)는 군수(君粹) 이니 정국공신(靖國公臣) 서평군(西平君) 숙창(叔昌)의 셋째아들이요, 증 보조공신(補祚公臣), 서성군(西城君) 익(翊)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환성군(歡成君)군 징(澄)의 따님이다. 공은 기품이 장엄(莊嚴)하고 언행이 신중(愼重)하며 공리(功利)를 멀리 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또한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아버지 병환중에도 단지(斷指) 주혈(注血) 하며 연명(延命)케 하였고, 마침내 하세(下世) 하시니 묘막(墓幕)에서 산채조식(山菜粗食) 으로 삼년상(三年喪)을 마쳤다.
公이 中宗 35년(1540)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처음으로 병조,이조(兵曹, 吏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이원현감(利原縣監)으로 있을 때 남해요지(南海要地)인 장흥부사(長興府使)에 특별히 선임되었다. 때마침 이 지방에 흉년이 들어 공은 불철주야 구휼양곡(救恤糧穀)을 마련하여 백성구호(百姓救護)에 전력을 기울이며 선정(善政)을 베풀으니 장흥부민(長興府民)이 公을 부모처럼 받들고 나라에서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내렸다. 公의 부중(府中) 군졸(軍卒)의 기강(紀綱)을 엄히 하고 지방에서 선출한 젊은이(貢生)들에게 무예(武藝)를 연마케하여 국가유사시(國家有事時)에 대비(對備)하였다.
명종10년(1555)5월에 왜적(倭敵) 70여척이 달양(達梁)포구(浦口)에 불법 침입하여 민가(民家).를 불태우고 성(城)을 포위했다. 公은 휘하 군졸들을 거느리고 병사(兵使) 원 적(元 績)과 더불어 적군(敵軍)과싸우니 좌충우돌(左衝右突), 공의 용역(勇力)이 이르는 곳마다 적병이 쓰러지고 피해 달아나는 적군을 쫓아 격전하였으나 세(勢)가 미치지 못하여 성(城)이 함몰하고 公도 장렬한 최후를 맞으니 바로 明宗10년 5월31일의 일이요, 公의 향년(享年)45세였다. 공의 배위(配位) 전주이씨(全州 李氏)로 문천정(文天正) 수갑(壽甲)의 따님이고 묘는 公과 합조(合兆)이다. 이남이녀(二男一女)를 두었으니 長男은 증 호조참판(贈 戶曹參判) 경유(景裕)요, 次는 창릉참봉(昌陵參奉) 경기(景棋)요, 여(女)는 권식(權寔)이다.
公이 몰후에 지사(志士)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이 이전쟁의 전모를 상세히 밝히는 전기(傳記)를 썻으며 율곡 이선생(栗谷 李先生) 의 추기(追記)로 서문(序文)을 썻다. 이와같이 공의 충절(忠節)이밝혀지므로 선조조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전례(典禮)에따라 치제(致祭) 하였으며, 철장석담일심순국(鐵腸石膽一心殉國)이라고 친필(親筆) 사액(賜額)이 있으니 이후 백수십년에 장흥유림(長興儒林) 들은 公의 위국 충절(爲國忠節) 과 애민선정(愛民善政))을 기려 사우(祠宇)를 영건(營建) 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그후 조정에서는 다시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충의(忠毅)라 내렸으며 향리(鄕里)인 평택(平澤)에는 충렬문(忠烈門)이라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장흥(長興)에는 충렬서원(忠烈門))을 세워 학행(學行)을 기리고 있다. 全南長興에는 公의 忠節을 기리기위한 忠烈祠를 지어 享배 하고 있다. 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 시향일 음 10월4일 이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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