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록(學行錄)

 
회헌공 한여해(晦軒公 韓如海 : 宣祖 40年(1607) ∼ 肅宗 19年(1693) 21世)
공(公)은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으로 휘(諱)는 여해(如海)요 자(字)는 호호(浩浩), 호(號)는 회헌(晦幹)이다. 전첨공 필후(典籤公 必厚)의 아들이고 석탄공 효중(石灘公 孝仲)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7대손이다.
 어머니 숙부인 경주 이씨(淑夫人 慶州 李氏)는 부원군 수일(府院君 守一)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宣祖) 40년(서기 1607) 11월 22일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천성(天性)이 기의(岐의 : 재능이 뛰어남)하였다. 벼슬길에 올라 27세인 163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명경(明經), 태학(太學) 등에 전념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을 탐독(探讀)하고 학문을 닦으니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따르고 의리(義理)는 백이숙제(伯夷叔齊)와 같았다고 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청(淸)나라에 항복하자 과거에 나가지 않고 은거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니 송우암(宋尤菴), 권수암(權遂菴)이 우러러 봤다. 현종(顯宗) 9년(1668)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희능 참봉(禧陵 參奉)이되고 그 후 위솔(衛率)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71년 예산현감(禮山縣監)에 나가 치적(治績)을 쌓았으며 이를 그만 두고 본향(本鄕 : 驪州 信谷)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쓰니 모름지기 학행, 효행으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숙종(肅宗) 19년(1693) 1월 5일에 졸하니 수(壽) 87이었다.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신곡 석탄공묘하 묘좌향(驪州郡 興川面 桂信里 信谷 石灘公墓下 卯坐向)에 안장(安葬)하였는데 1699년 10월 3일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고산대하묘좌유향(忠淸北道 忠州市 金加面 岑屛里 古山臺下卯坐酉向)에 배위(配位) 증 정부인 광주 이씨(贈 貞夫人 光州 李氏)와 이장합조(移葬合兆)되었다.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의 찬갈(撰碣)이다.
 계배(繼配) 증 정부인 경주 이씨(贈 貞夫人 慶州 李氏)는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석탄공 신도비 후강(驪州郡 興川面 桂信里 石灘公 新道碑 後崗)에 모셨다.
 공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으며 공의 학행(學行)과 절의(節義)를 칭송흠모하는 충주 인근 여러 고을 선비들이 광복 후(1958) 인곡사(仁谷祠)를 짓고 공을 배향(配享)하였다.
 아들은 이탄 재기(伊灘 載箕), 계포 용기(溪圃 用箕), 남애 원기(南涯 遠箕), 진기(振箕), 통정 서기(通政 緖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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