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행정려록(烈行旌閭錄)

 

열녀 숙인 거창 신씨(烈女 淑人 居昌 愼氏)

열녀 숙인 상주 황씨(烈女 淑人 尙州 黃氏)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열녀로 숙인 거창 신씨(淑人 居昌 愼氏)는 증 영의정 청성 부원군 정랑공(正郞公 : 질)의 7대손이요 감사공(藍司公 : 德遠)의 셋째 아들인 곡성공(谷城公 : 정)의 배위이고 증 숙인 상주 황씨(尙州 黃氏)는 곡성공의 큰 아들 증 원정공 공휴(贈 院正公 : 公休)의 배위가 되므로 거창 신씨와는 고부간(姑婦間 :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이 된다.
두 열녀는 평소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두터웠으며 언행이 공손하고 예의가 바른 부녀(婦女)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병자호란은 청태종(淸太宗)이 10만 대군으로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일어난 전란인데 청나라는 원래 우리가 호족(胡族 : 되놈, 야만인)이라고 천대하던 만주지방에 흩어져 살던 여진(女眞)부족을 건주위(建州衛) 추장 누루하치가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웠으며 인조(仁祖) 14년 병자(1636년)에 이르러 청나라로 개칭(改稱)하고 태종이 황제위(皇帝位)에 오르면서 우리나라에 대하여 군신관계(君臣關係 : 청나라를 군주의 나라로 우리를 신하의 나라로)를 강요했으나 우리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일어났는데 청군이 남하(南下)하자 두 왕자(鳳林, 麟平)를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과 귀족남녀를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게 하고 임금과 조정(朝廷)도 뒤따라 가려했으나 이미 길이 막혀 부득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미구(未久)에 믿었던 강화성이 함락돼 두 왕자를 비롯한 많은 남녀가 포로로 잡혔으며 호군은 살인, 방화, 약탈을 일삼고 부녀자를 닥치는 대로 겁탈하는 등 만행이 우심하였다.
이 때 거창 신씨와 상주 황씨 고부도 전란이 일자 강화도 남쪽의 정족산성(鼎足山城 : 현 전등사가 있는 성)으로 피난갔었는데 강화성이 함락되고 호군의 잔혹한 만행소식이 들려오며 호군이 점차 남하(南下)하는지라 부득이 통진쪽으로 피난하기 위하여 간신히 피난선에 올랐으나 대안(對岸)인 어도진(魚渡津 : 현 대명나루)도 이미 호군이 점령하여 빨리오라고 호통을 치고 뒤에는 호군의 만행으로 아수라장이니 참으로 진퇴양난의 곤경인지라 고부는 사세가 무사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늙은 노비에게 3살난 어린 장(樟)을 부탁하고 양반가의 부녀로서 정절(貞節)을 지키기 위해 고부가 껴안고 투강자결(投江自決)하였다.
늙은 노비는 아기를 업고 울면서 통진 본가에 돌아와 곡성공께 전후 사연을 상세히 고하고 아기를 바치니 집안이 슬픔에 잠겼다. 그날 밤 곡성공 꿈속에 고부가 나타나서 우리가 어도진에 있으니 빨리 수습하시오 하는지라 놀라 깨어 급히 노비들을 깨워 나루터로 가는데 그뭄밤 인데도 하늘에서 광채가 빛나 어렵지 않게 고부가 껴안은 시체를 발견하여 집으로 모셨다가 후일 선영에 장례했다. 인조 16년 6월에 이번 전란중의 열녀들에게 예조를 통해 정문(旌門 : 열녀문)을 내렸는데 유독 신씨, 황씨 고부는 혼자하기도 어려운 일을 둘이 껴안고 투강 자결한 열행 이 너무나도 장하고 한편 남편인 곡성공 한 정(韓  정)이 호장(胡將)을 구슬려 호병들의 행패를 막은 것까지 임금에게 알려져 인조대왕이 친필칙지(親筆勅旨)로 명정(命旌)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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