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倡義錄 : 義士)

 
참모공 한상렬(參謀公 韓相烈 : 高宗 13年(1876)∼1926 32世)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휘(諱)는 상렬(相烈)이요 일명(一名) 상열(相說)이며 자(字)는 문극(文極)이다. 강원도 횡성(江原道 橫城) 출신인데 고종(高宗) 13년(1876)생이다. 동수(東洙)의 아들이며 영석(英錫)의 손자이고 절도사공 만손(節度使公 萬孫)의 18대 손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締結)되고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국군대 강제해산으로 국권(國權)이 일본에게 침탈(侵奪)되자 그해 8월에 국권을 회복(回復)할 목적으로 동지(同志) 200여명을 규합한 뒤 향리인 횡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홍천(洪川), 횡성(橫城), 원주(原州), 지평(砥平), 영월(寧越) 등지에서 반일 투쟁을 전개, 일본군과 무려 500여차에 걸친 전투에서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고 무기, 탄약 등을 노획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불의(不義)에 굽힐줄 모르는 성품을 타고 났으며 1908년 4월초 횡성 주둔 일본수비대가 그의 가산(家産)을 몰수(沒收)하고 처자를 납치한 뒤 협박하여 귀순을 강요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횡성읍을 습격하여 이들을 대경실색(大驚失色)케 하였다. 일제(日帝)가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를 앞두고 의병에 대하여 일대탄압을 가하므로 국내에서의 의병활동 전개가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자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그 뒤 1920년 만주(滿洲)로 망명, 대한의용부(大韓義勇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 애국단체의 참모(參謨)로서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하여 활동하다 1926년 9월 19일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던 주중청년총연맹(駐中靑年總聯盟)의 공산당원의 흉탄에 51세로 순직하였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建國功勞勳章 國民章. 第159號)이 추서(追敍) 되었다. 묘(墓)는 불전(不傳)이며 한상렬의사 추모비(韓相烈義士追慕碑)를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橫城郡 隅川面 文岩里)에 세웠다. 아들은 공의 동생 상규(相圭)의 아들 정희(正熙)로 계자(系子)를 삼았다. 참모공 한상렬의사 추모비(參謀公 韓相烈義士 追慕碑)는 강원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박한설(江原大學校 敎授 文學博士 朴漢卨) 찬(撰)으로 1993년 6월 24일 세웠다. 배위(配位) 밀양 박씨(密陽 朴氏)는 성훈(聖勳)의 따님인데 묘(墓)는 하궁리(下弓里) 울둔노루골 계좌(癸坐)에 있다. 배위(配位) 밀양 박씨(密陽 朴氏)는 왜경(倭警)에 붙잡혀 수년간 옥고(獄苦)를 치루다 탈옥 (脫獄)하여 해방(解放, 1945.8.15)될 때까지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다 졸하였다.

 
번호     이 름 조회
1 한정만 2891
2 한진교 4584
3 한봉근 4237
4 한용순 2920
5 한상렬 3502
6 한태석 3035
7 한백봉 2906
8 한준석 3304
9 한양리 2716
10 한흥근 2744
11 한봉수 3377
12 한흥교 3857
13 한봉인 2947
14 한순회 3258
15 한필호 3527
16 한징 3977
17 한성수 3941
18 한계석 2664
19 한봉석 2781
20 한훈 3166
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