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倡義錄 : 義士)

 
송헌공 한백봉(松軒公 韓百鳳 : 고종(高宗) 18년(1881∼1950) 29世)
공(公)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휘(諱)는 백봉(百鳳)이요 자(字)는 성의(聖儀), 호(號)는 송헌(松軒)이다. 영회(榮會)의 셋째 아들이고 필호(弼浩)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15대 손이다. 어머니는 김해 김씨(金海 金氏)로 형식(亨植)의 따님이다.
공(公)은 고종(高宗) 18년(1881) 8월 28일 광주군 돌마면 율리(廣州那 突馬面 票里 : 現 城南市 盆唐區 票洞)에서 태어나 서진사 문하(徐進士 門下)에서 수학(受學)하고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울분(鬱憤)으로 지내던 중 을미년(乙未年)(1919) 3월 고종황제(高宗皇帝) 인산시(因山時) 상경(上京)하여 손병희(孫秉熙), 한용운(韓龍雲) 등의 삼일독립선언취지(三一獨立宣言趣旨)에 적극(積極) 찬동(贊同)하여 독립만세(獨立萬歲) 시위(示威)에 참가(參加)하고 독립선언(獨立宣言) 대표(代表)인 청암(淸菴) 권병덕(權秉悳)과 오화영(吳華英) 선생(先生)을 만나고 고향(故鄕)에 돌아와 3월 27일 분당리(盆唐里) 장날을 이용(利用)하여 율리(票里) 동민(洞民) 50여명을 모아 뒷동산에 올라가 만세(萬歲)를 부르고 봉화(烽火)를 올려 돌마(突馬) 낙생(樂生) 오포면(五浦面) 주민들을 분당리(盆唐里)장터에 모이게 하고 태극기(太極旗)를 앞세우고 1000여명이 다음날 저녁까지 돌마(突馬), 낙생(樂生), 대왕(大旺)을 오가며 시위(示威)를 하다가 일본(日本)헌병대(憲兵隊)에 붙잡혀 남한산성(南漢山城) 파견대(派遺隊) 수원(水原) 재판소(裁判所)를 거쳐 서대문(西大門) 감옥(監獄)에 투옥(投獄)되어 1년여의 옥고(獄苦)를 치루었으며 공(公)은 법정(法廷)에서 ‘우리가 조선인(朝蘇人)으로서 정의(正義)와 인도(人道)에 기인(起因)하여 조선(朝鮮)의 자주독립(自主獨立)을 주장(主張)함은 죄(罪)가 아니다.’라고 강변(强辯)하였다. 공(公)은 출옥(出獄) 후에도 동지(同志)들을 규합(糾合)하여 1927년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廣州支會)를 결성(結成)하여 농민운동(農民運動)을 독려(督勵)하고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에 앞장서서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워주었다.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진력(盡力)을 하는 가운데 몇 년간 전국(全國)을 누비며 일가(一家)들을 찾아 다니며 설파(說破)하고 일본(日本) 수사기관(搜査機關)의 눈을 피(避) 하기 위해 문정공(文靖公) 재실(齋室) 건립(建立)을 위한 수단(收單)을 하여 정성(精誠)어린 성금(誠金)으로 문정공(文靖公) 재실(齋室)을 1939년 준공(竣工)하고 그 이름을 영모재(永慕齋)라고 하였다. 이때에 공(公)의 노력(努力)은 눈물겨운 지극정성(至極精誠)의 극치였다. 갖은 고난(苦難) 끝에 해방(解放)을 맞고 1950년 한국동란(韓國動亂)중인 9월 8일 70세로 졸(卒)하였다. 1990년 8월 15일 정부(政府)에서는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로 지정(指定)하고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 : 제 177호)을 추서(追敍)하였다. 아들은 인택(仁澤)이다. 공(公)과 배위(配位) 평택 임씨(平澤 林氏 : 父都事 會淳)의 합조묘(合兆墓)이다.
 배위(配位)는 1982년 4월 14일 96세로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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