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倡義錄 : 義士)

 
의사 한준석(義士 韓駿錫 : 高宗 19年(1882))
공(公)은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다. 휘(諱)는 준석(駿錫)이고 자(字)는 행림(杏林)이며 호(號)는 태방(太方)이다. 의사 해용(醫師 海用)의 아들이고 태인공 대기(太仁公 大起)의 손자이며 예빈윤공 연(禮賓尹公 連)의 후손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세윤(世允)의 따님이다. 공은 고종(高宗) 19년(1882) 10월 4일 생으로 함경남도 함주군 선덕면 서당(咸鏡南道 咸州郡 宣德面 書堂)에서 문하생(門下生) 50여명에게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과 한문학(漢文學)과 의학(醫學)을 가르치던 중 경성(京城)에서 삼일만세운동(三一萬世運動)을 일으켜 전국으로 확산(擴散)될 때 이 운동의 지시(指示)를 받고 문하생(門下生)50여명을 인솔하여 선덕면 경찰관 주재소(宣德面 警察官 駐在所)를 습격(襲擊) 후 기물(器物)을 파괴(破壞)하고 경찰관을 무장해제(武將解除)시키고 이곳을 떠나가겠다는 항복(降服)을 받았으니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면민(面民)과 같이 독립만세(獨立萬歲)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날 함흥시 본서 경찰관 형사(咸興市 本暑 警察官 形事) 30여명이 선덕면 서당(善德面 書堂)을 포위하고 훈장(訓長)인 공(公)과 서당학생 10여명을 체포하여 주재소(駐在所)에 가두어 놓고 갖은 고문(拷問)을 계속하다 학생들은 3일 후 석방하고 공(公)은 계속 유치하다 3개월 후 석방하니 이는 민중(民衆)의 동요(動搖)가 심하고 경찰서가 좁아서 유치할 장소가 없어서였다고 한다. 석방된 후에 계속 주재소(駐在所)에 호출되어 문초(問招)하며 서당(書堂)을 없애게 하였다. 공(公)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정평군 귀림면 하동리(定平郡 歸林面 河東里)에 이도(移徒)하여 다시 서당을 짓고 선덕면 서당(宣德面 書堂) 때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약 5년이 지난 후 또 발각되어 이 땅을 피하여 함주군 선덕면 구납리(咸州郡 宣德面 九南里)에 이도(移徒)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잊지 않았다. 배위(配位)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용훈(用壎)의 따님이다. 아들은 영국(永國, 系龜錫后), 의학박사 영빈(醫學博士 永彬), 덕유 영현(德惟 永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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