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倡義錄 : 義士)

 
한양리(韓良履 : 1883(고종 20年)∼1946)
 한말의 의병. 자는 여경(女敬), 호는 석초(石樵). 경상북도 문경 출신. 1906년부터 1908년에 걸쳐 이강년(李康秊)의 의병부대에서 종사관(從事官)으로 의병소집활동을 하였으며, 원주 · 단양 · 제천 · 갈평 · 안동 · 내성 · 재산, 경기도 관악산 등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바 있다. 또한, 1908년 6월 청풍작산전투(淸風鵲山戰鬪)에서 의병이 패하고 대장인 이강년이 순국함에 따라 의병진이 분산되자 1909년 1월 이토(伊藤博文)를 도륙(屠戮)하고자 이 강년의 장남인 승재(承宰)와 함께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에 이기하(李起夏)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성에 잠입해서 거사를 진행하던 중 비밀이 폭로되어 피신하다가 예천군 용궁(龍宮)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19년 동지 이응수(李應洙) · 서상업(徐相業)·김찬규(金燦奎) 등과 거사를 모의하고 이듬해 4월에 의용단(義勇團)을 조직, 길림군정서(吉林軍政暑) 및 흥업단(興業團)과 제휴하였다. 군정서로부터 군자금모집 · 사서(事書)·권총·폭탄·암호문·독립신문 등의 지원을 받고 의용단 경상북도 간사에 임명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뒤 1922년 11월 18일 이응수 · 이대기(李大基) 등과 함께 비밀사무실(대구 계림여관)에서 연락 서신을 작성하던 중, 50여명의 동지와 함께 붙잡혔다. 1940년 이후에는 예천군 유천면에서 학숙(學塾)을 열어 문인(門人)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또한 《운강문집 雲崗文集》의 정리 및 《윤강선생창의일록 雲崗先生倡義日錄》을 위한 자료정리에 전력을 기울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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