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倡義錄 : 義士)

 
의병장 한봉수(義兵將 韓鳳洙 : 高宗 21年(1884)∼l972 31世)
공(公)은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이다. 휘(諱)는 봉수(鳳洙)요 일명(鳳瑞), 봉용(鳳用), 봉룡(鳳龍·義兵活動을 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다.)이며 고종(高宗) 21년(1884) 4월 18일 청주군 북일면 서교(淸州郡 北一面 細橋)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少年時節)부터 의(義)를 잊지 않았다. 왜병(倭兵)의 압력(壓力)으로 한국군대(韓國軍隊)가 강제해산(强制解散)된 1907년 의병장 김규환(義兵將 金圭煥)을 만나 감화(感化)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의병(義兵)에 가담하게 되었다. 청주 세교장(淸州 細橋場)에서 기의(起義)하여 4년 6개월 동안 33전(戰) 1패(敗)의 전과(戰果)를 거둔 유격전(遊擊戰)의 명수(名手)였는데 17세부터 명포수(名砲手)로 이름이 났다.
 1907년 의병(義兵) 10여명이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진천군 문백면(鎭川郡 文白面)에서 일본군 헌병중위 시마자가(憲兵中尉 島崎善治) 등 3명을 사살(射殺)하고 말도 폐사(斃死 : 쓰러져 죽음)시켰다. 그리고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약 3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미원(米院), 진천, 괴산, 횡성, 장호원 등으로 출동(出動)하여 혁혁(赫赫)한 전과(戰果)를 올렸다. 그뒤(1909) 상해(上海)로 건너가 의병활동(義兵活動)을 하려고 서울 선교사(宣敎師) 집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서울역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교수형(絞首形)을 선고(宣告)받았으나 일제(日帝)의 소위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출옥(出獄)되었다.
그후 3.1운동 때에는 청주(淸州)에서 시위(示威)하다 2년 6개월의 영어생활(囹圄生活)을 겪었다. 해방후(解放後) 삼일절(三一節)에 건국공로훈장단장(建國功勞勳章單章)을 받았으며 1972년 12월 25일 89세로 졸하였다. 왜놈이 문백면(文白面)에 헌병중위 시마자가(憲兵中尉 島崎善治)가 죽은 자리에 시마자기비(島崎碑)를 세웠던 자리. 죽은 말을 바위백이에 묻었기 바위백이 말무덤이라고 전 하는곳. 이제 이 자리에 공의 위훈(偉勳)을 추모(追慕)하고자 충청북도 정종택 도지사(忠淸北道 鄭宗澤 道知事), 한성동 진천군수(韓成東 鎭川郡守) 문백면민(文白面民) 일동의 정성(精誠)으로 1977년 6월 죽산인후 안형렬 찬(竹山人后 安亨烈 撰)과 상산인후 임상훈 서(常山人后 林相焄 書)로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성암천(鎭川郡 文白面 玉城里 聖岩川)옆에 의거비(義擧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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