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미상편(世系未詳篇 : 高麗)

 
기거주공 한뇌(起居住公  韓  賴 : ?∼ 毅宗 24년(1170) 世)
고려 의종(毅宗) 때의 문신이다. 의종 24년(1170) 2월 왕이 연복정(延福亨)에 행차하여 평장사 허홍재(平章事 許洪材). 지어사대사 이복기(知御史臺事 李復基), 기거주 한 뢰(起居注 韓 賴) 등을 불러, 배를 띄우고 해가 다하도록 술마시며 즐기고, 드디어 화평재(和平齋)에 머물렀다. 3월에도 왕은 시신(侍臣)들과 여러 차례 연회를 베풀었으며, 5월에는 또 화평재에서 연회를 베풀고 내시 황문장(黃文莊)에게 붓을 잡게 하고 태평세월에 글을 좋아하는 임금 <太平好之文王>이라 쓰게 하였고, 그 후에도 연복정, 서강 등처에서 이와 같이 하였다. 임금과 시신들이 몹시 취하여 밤중까지 돌아갈 줄 모르니 좌승선 김돈중(左承宣 金敦中)이 왕 앞으로 나아가 “호종(扈從)하는 군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모두 주림과 피곤에 빠져 있는데 주상께서는 어찌하여 즐기기만 하십니까?” 또 “밤이 어두운데 무엇을 관람하시려고 여기에 오래 머무르고 계십니까?”하니 왕은 불쾌히 여겼다.
그러나 왕은 계속 선유(船遊)를 즐기며 시신들과 시주(詩酒)로 나날을 보냈다. 한 뢰는 이렇듯 왕의 총애를 받고 무신들을 시기해 오던 중 대장군 이소응(李紹應)이 한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에 져서 달아나므로 한 뢰가 앞으로 나가 소응의 뺨을 쳐서 뜰 아래로 떨어뜨렸고, 좌부승지 임종식(左副承旨 林宗植)과 이복기도 소응을 꾸짖었다. 이에 대장군 정중부(鄭仲夫)와 김광미(金光美), 양 숙(梁 肅), 진 준(陳 俊) 등이 변색하여 서로 눈짓하고 정중부가 소리 높혀 한 뢰를 꾸짖어 이르기를 “이소응이 비록 무부(武夫)이나 품계가 3품인데 어찌 욕을 심히 하느냐?”하니 왕이 중부의 손을 붙잡고 화해시켰다. 그러나 견용행수산원 이 고(牽龍行首散員 李 高)가 칼날을 빼어 들고 정중부에게 눈짓하니 중부는 이를 말렸으나 날이 어두워지자 어가(御駕)가 보현원(普賢院)에 당도할 때 이 고와 산원 이의방(散員 李義方)이 먼저 가서 왕의 유시(諭示)라고 거짓 꾸며 순검군(巡檢軍)을 집합시켜 놓고, 왕이 막 문 안으로 들어가고 여러 신하가 물러나려 할즈음에 임종식과 이복기를 문에서 쳐죽였다. 이 때 김돈중은 난이 일어났음을 알고 도망하고, 한 뢰는 친한 환관(宦官)에 의탁하여 몰래 안으로 들어가 왕의 침상 아래로 숨었다. 왕이 크게 놀라 환관 왕광취(王光就)로 하여금 금지케 하였으나 정중부가 말하기를 “화의 근원인 한 뢰가 아직도 주상의 곁에 있으니 내보내어 베기를 청합니다”하였다.
내시 배윤재(內侍 裵允才)가 들어가 왕께 아뢰니 한 뢰가 주상의 옷을 잡고 나오지 않으므로 이 고가 칼을 빼어 위협하니 그제야 나왔는데 즉시 베어 죽였다. 그리고 호종했던 문신과 대소신료(大小臣僚) 및 환관들을 모두 죽이고 왕을 환궁시킨 후 또 서울에 있는 문신 50여인을 죽였다. 이 때 이의방 등 무신들은 문신들의 집을 철거하고자 하거늘 진 준(陳 俊)이 이를 만류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이 미워하는 자는 이복기와 한 뢰 등 45인인데 이미 죄없는 자를 죽임이 심하였거늘 또 그 집마저 철거한다면 그 처자는 장차 어디에 기생(寄生)하리요?” 하였으나 이의방 등이 듣지 않고 군사를 놓아 모두 헐어 버리니, 이 뒤로는 무인들은 상습적으로 원수가 있는 자의 집을 헐게 되었다. 한 뢰는 환관으로서 주상을 옳게 모시지 못하고 왕의 총애만을 믿고 무관틀을 천시하다가 마침내 몸을 망치고 이로 인하여 의종은 추방되고 마침내 무선정권을 초래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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