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월당 한  숙(松月堂 韓 塾) 仁祖 24年(1646)~肅宗 36年(1710) 23世)
公은 조선 숙종(肅宗) 때의 문신이다. 호는 송월당(松月堂)이며, 오규(五奎)의 아들이고 혜의 손자이다. 인조(仁祖) 24년(1646)에 태어났다. 공은 문재(文才)가 뛰어났으며 20대에 계곡선산(桂谷先山)의 묘정화(淨化)에 힘썼다. 현종(顯宗) 14년(1673)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숙종(肅宗) 6년(1680)에 휘능참봉(徽陵參奉), 동왕 27년(1701)에 사마별제(司馬別提), 금부도사(禁府都事),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이듬해 용안현감(龍安縣監)에 나가 선정(善政)을 베푸니 용안 선비들이 흥학비(興學碑)와 청덕비(淸德碑)를 세워 치적(治積)을 기렸다. 동왕 34년(1708)에 형조정랑(形曹正郞)이 되었으나 다시 금천군수(金川郡守)로 나가 선정(善政)함이 용안현감 때와 같았으며 한때 해주 병마절제사(海州 兵馬節制使)로 나갔으나 동왕 36년(1710) 7월 26일 65세로 졸하였다. 보학(譜學)에 능하여 《갑신보(甲申譜)》간행에 힘썼으며, 금천군수로 있을 때 시조(始祖) 묘의 심득(尋得)에 따라 숙(塾), 성우(聖佑), 형(형) 등이 제소하여 확인을 얻고 광중(擴中)을 열어 보니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다시 묻고 개봉축하는 등 선조묘의 정화에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贈 嘉善大夫 吏曹參判)이시다.
배위(配位) 증 정부인 은진 송씨(贈 貞夫人 恩津 宋氏)는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기상(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耆相)의 따님이며 아들은 생원 덕흠(生員 德欽), 부사 성흠(府使 聖欽), 익흠(益欽), 동지중추 용흠(同知中樞 龍欽), 기흠(夔欽)이다.
公은 숙종(肅宗) 36년(1710) 7월 26일 송월당(松月堂 : 자택)에서 졸하였다. 배위(配位)인 증 정부인 은진 송씨(贈 貞夫人 恩津 宋氏)는 숙종 17년(1691) 11월 28일에 졸하니 합조(合兆)되었다. 공은 선조묘를 정화하는 과정에서 비를 많이 세웠다. 그러나 공은 내가 죽거든 아무 한 일도 없는 사람한테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공의 우인(友人) 가선대부 호비사직 권규(嘉善大夫 虎賁司直 權珪)가 행장(行狀)을 지었다.약 290여년이 흐르면서 현대에 이르러 후손들이 그 큰 공을 기리기 위해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자는 종의(宗議)에 따라1980년 문학박사 한갑수(文學博士 韓甲洙)의 서(書)로 묘 좌하단(左下段)에 세웠다.
 
位置 : 京畿道 富川市 素砂區 桂壽洞 山15 寅坐 歲享日 : 음 10月 5日
17세기의 조선은 사회적으로 혼란을 수습하던 시기이고 학문적으로 實學(실학)이 태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시기이다. 이 무렵의 부천도 두 외란이 끝나 혼란이 수습되던 때이고 고강동. 계수동. 부천뜰에서는 꾸준히 역사적 흐름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이다. 특히 계수동 청주한씨들의 ‘대를 이은 효행과 충성 제일’의 흐름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韓塾(한숙)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인조 24년(1646)에 청주인 오규(五奎)와 한양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한숙은 자를 수이(受而), 호를 소월당(松月堂)이라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인품과 뛰어난 재질로 주위의 관심을 끌었으나 6세 때 어머니를, 7세 때 아버지를 여위는 등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고 진외가의 종증조부(從曾祖父)고강동의 오정공 변삼근(梧亭公 卞三近)의 후실 우씨(禹氏) 등의 손에서 자라났다. 변삼근의 능력에 대해서는 사후 왕이 제문을 내려 슬퍼할 정도였으니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며 송월당도 오정공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송월당은 어린시절이 순탄치 않았음에도 항상 면학과 수신을 게을리 하지 앟아 조용주(趙龍洲)는 송월당의 시(詩)와 부(賦)를 읽고 글재주에 크게 놀라 극착을 아끼지 앟았다. 더욱이 현종 5년(1664) 삼척부사를 그만두고 향리인 연천에 있던 미수 허목(眉搜 許穆)을 만나자 미수는 ‘그대 선친인 오규가 재주있고 글이 뛰어났으면서도 일찍 세상을 떠나 슬퍼했으나 그 아들이 성장하여 뛰어난 글재주로 나를 대하니 회고하여 슬픈 마음을 금할 수 없구나’ 하였다. 송월당은 16세 때 은진송씨를 맞이하여 혼례를 치른 후 본가로 돌아왔다. 본가로 돌아와 계수동 선영을 둘러보니 묘 앞에 표석이 없음을 보고 비석과 신도비를 마련하였으며 한편으로 가세를 일으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현종 14년(1673) 28세의 나이에 사마시에 응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榜中(방중) 선비들의 추천으로 성균관, 향교, 사학 등에 거처하던 임원인 色掌(색장)이 되었다. 이후 여러 번 大小科(대소과)에 응하였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지 못하다가 비로소 진사가 되었다. 숙종 6년(1680) 조정에서 숙종 때 처음으로 간행된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고쳐 편수코자 할 때 그를 편수관으로 추천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고, 그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과거에도 응하지 앟았다. 그 후 판서 沈梓는 송월당이 족보편찬에 조예가 깊음을 알고 다시 조정에 추천하여, 주위 선비들도 강력히 천거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숙종 24년(1698) 휘릉참봉(徽陵參奉)이 되어 부임해 보니 능 위에 있는 풀들이 충해로 인해 말라 가는데도 전임들이 일의 방대함 때문에 손대지 않았음을 알고 곧바로 봉심대신(奉審大臣 - 왕명을 받들어 능을 보살피는 대신)에게 강력히 말하여 사초를 갈아 원생대로 회복하였다. 선대의 묘를 보살피는 데는 역시 그와 같은 정성을 보여 원상을 회복하였다. 참봉을 지낸 후 어린이들을 위해 각 군에 두었던 동몽교관(童蒙敎官 - 일명 동몽훈도)이 되었다가 숙종 27년(1701) 사마별제(司馬別提)와 의금부(義禁府)의 종5품 도사(都事), 공조좌랑 (工曹佐郞- 정5품)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재임 기간동안 공적인 것과 사사로운 것을 분명히 하였는데 탐관오리들이 쇠부스러기를 거두어 사사로이 재산으로 부리는 폐단이 심하므로 관에서 쓰는 용기가 부족하였다. 이를 알고 쇠로 그릇과 솥 등을 많이 주조하여 창고에 보관해 놓고 공공기물로 쓰는데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그 이듬 해(1702) 용안현감(龍安縣監 - 전북 익산군에 있는 지명)이 되어 학교와 사당을 모두 가지런히 정리, 보수하고 윤리도덕의 기강을 크게 바로 잡았다. 선정을 베푸는 한편 옛 풍습을 일으키는데 힘을 다하고 長幼의 질서를 바로잡아 경로의 미풍을 진작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용안을 떠난 후 용안 지역의 선비들이 흥학비(興學碑)와 청덕비(淸德碑)를 세워 그의 치적을 기리었다. 숙종 34년(1708)에 형조정랑이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다시 금천군수(金川郡守 - 황해도 동남에 위치)가 되었으나 얼마되지 않아 병환으로 인해 사직하고 귀향하여 요양하던 중이던 숙종 36년(1710) 여름 6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효심과 선정을 인정하여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추가로 증여하였다. 묘는 계수동 함박산에 선영들의 묘와 함께 있는데 비문은 가선대부를 지낸 權規(권규)가 ‘금천군수한공행상(金川郡守韓公行狀)’이라 써 전한다. 운명하던 날 송월당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을밀대에 옛날 와서 청산은 끝하는 바가 없고 물은 동을 흐르네. 곁에 있는 이들아 예사로운 일일랑 묻지를 마오, 지팡이에 기대어 강남의 수많은 누각이나 찾아볼까 하네.’ 여기에서 우리는 송월당의 초현실적이며 자연주의적인 순진무구한 노장사상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송월당은 현종 5년부터 미수 허목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미수 사후 그의 유고를 수정하여 간행하였다. 미수가 삼척부사로 있는 동안 동해비(東海碑)를 세우고 만년에 비문 한 부를 다시 베껴 송월당에게 보내 주었다. 미수 사후 비석이 부셔져 당시 삼척부사 홍만기(洪萬紀)와 송월당의 둘째 아들로 당시 강원도 울진군 평해현감(平海縣監)으로 있던 성흠(聖欽) 등에게 부탁하여 재건케 했다. 송월당은 살결이 희고 용모와 수염이 아름다웠다. 남을 받아들일 만큼 도량이 있고 성품이 온화하며 간결하여 담소하는 모습이 가히 군자라 할 만 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조상 모시기를 잘하였고, 禮記(예기)에 밝고 문장에 능했으며, 필법은 힘이 있어 마치 진인(晉人)의 서체(書體)와 비슷하다고 일컬어졌다. 송월당은 어려운 이웃에 대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기가 가진 것이 없으면 주위의 여러사람을 설득하여 이를 돕게 하였으며, 외로움으로 곤경에 빠진 이가 있으면 반드시 구제책을 마련하여 도와 주었다. 유년 시절 스승에게 자주 아무도 물어보지 않은 호기심있는 이상한 질문으로 하여 스승을 놀라게 하였으며 허약한 체질이 그의 뜻을 펴지 못하게 함을 늘 개탄하였다. 그는 병환으로 집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반드시 의관을 바르게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성인의 글로 가득 찼다. 허약한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금강산에 두 번이나 등정했으며 그곳을 샅샅히 답사하였다. 그는 대학자 退溪 李滉(퇴계 이황)을 흠모하여 그를 배향한 경북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의 정경이 꿈에 늘 보였는데 실제로 도산 그림을 보고 꿈 속의 그림과 너무 흡사해 기뻐하기도 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는 그가 현종과 숙종 연간(1660∼1710)에 지은 필사본시문집《복부》(자기의 시문을 낮추어 부르는 말 : 질자 주) 1책(60장, 25.7 × 17.5cm, 담황색으로 두껍게 배접하였고 황사로 철하였음)이 전하고 있는데 목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詩 : 立春日 奉呈日强兄案下求和 內寅(1686),奉送申督郵金泉之行 乙丑(1685)八月 十三日. 謝夢賚詩. 奉呈申兄. 衍韻成律奉呈申兄求和. 鄭成悅大夫人 挽. 黃漫浪夫人挽. 韓進士世輔挽. 次聖瑞韻奉賀好伯. 李囊陽而遠挽. 辛 洪原子挽. 洪兵使時疇挽. 洪正字査濟挽. 韓進士挽. 姜進士楡挽. 謝申兄 惠穀詩. 送藥료申兄. 送申公美之任. 聞吳三桂之將 李姓 人爲淸人所殺其 妻楊氏 爲淳失仇 聚兵入茅鹿山 日淸人相全 淸人甚患云云 聞而義而壯之遂 賦一絶 祭韻弟洪重明文. 祭妹兄鄭公文 東岳. 祭內弟趙悅卿文. 祭眉垂許先生文.  韓龍二墓書. 申玧墓書. 平山申錫夏墓誌 등. 묘 : 경기도 소사구 계산동 산 15 세향일 : 음 10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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