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군 한 복(西原君 韓 復 : 13世)
고려 말의 문신이다. 고려에서 원(元)나라에 귀화(歸化)하였다가 다시 원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였다. 판관공 홍보(判官公 洪甫)의 아들이며 부사공 주(府使公 柱)의 손자이다. 순제(順帝)의 지정(至正) 원년(1341)에 진사시에 장원하여 벼슬이 추밀원 부사(樞密院 副使)에 이르렀다.
공민왕(恭愍王) 19년(1370) 이성계(李成桂)가 올랄산성(兀刺山城)을 쳐서 성이 함락함에 무너진 담 가운데서 우는 소리가 있음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사람이 벗은 몸으로 서서 가리고 울거늘 잡아서 물으니 이에 말하기를 “나는 원조(元朝)에서 장원한 배주(拜住)인데 귀국(貴國)의 이인복(李仁復)은 나와 동년(同年 : 同傍及第)이다” 하니 이성계가 그 말을 듣고 곧 이성계의 옷을 입히며 말(馬)을 주어 태우고 드디어 함께 오니 왕이 후하게 대우하여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 삼고 성명을 한 복(韓 復)이라 사(賜)하였다. 왕이 적전(籍田 : 天子가 祖廟에 進供할 米穀을 親耕하는 田地)에 행차할 무렵 먼저 신 돈(辛 旽)을 명하여 가서 보게 하거늘 신 돈이 여락(女樂)으로써 스스로 따르게 함을 보고 미워하여 따르지 않았다.
이성계를 섬기기를 극진히 하고 이인복, 이 색(李 穡)과 함께 서로 글로써 창화(唱和)하였고 과거보는 사람들이 많은 정문(程文 : 試驗場에서 쓰는 一定한 法式을 갖춘 文章)의 하정(賀正)을 받았다. 판서(判書)를 지내다 누천(累遷)하여 대광서원군(大匡西原君), 진현관 대제학(進賢館 大堤學)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운봉 박씨(雲峰 朴氏)이며 아들은 감사 암(監司 巖)이다.
공은 전의면 관정리(全義面 觀亭里) 산에 안장(安葬)되었는데 배위 운봉 박씨(配位 雲峰 朴氏)와 합조(合兆)이다. 묘 둘레에 돌을 쌓은 것은 그 때의 풍습(風習)에도 있었거니와 유언(遺言)에 따른 것이라고 전한다.
 
位置 : 忠南 燕岐郡 全義面 觀享里 山45-1
歲享日 : 陰 10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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