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군 한방신(西原君 韓方信 : ?∼우왕 2년( 1376) 10世)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문신(文臣)이요 무신(武臣)이다. 우정승(右政丞)을 지내고 충혜왕묘(忠惠王廟)에 배향(配享)된 사숙공(思肅公 : 渥)의 아들로 제학공(提學公 : 謝奇)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 원주 원씨(原州 元氏)이니 동지밀직사사 경(同知密直司事 卿)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형을 공경(恭敬)하고 따르며 아우를 부호(扶護)하여 사랑하는 우애 (友愛)가 습성화(習性化)하고 겸양(謙讓)과 예의(禮儀) 바른 미덕(美德)의 인물로 성장 하였다. 그리고 장수(將帥) 다운 기국(器局 : 재간과 도량)과 지략(智略 : 슬기있는 꾀) 이 있었고 일찍이 학업에 정진(精進 : 정력을 다하여 부지런히 힘씀)하여 경사(經史)와 시문(詩文)에 통달(通達)하였으며 공민왕 4년(1355)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관직에 누진(累進)하여 동왕 7년 상장군(上將軍)으로서 동북면 병마사(東北面 兵馬使)로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추밀원 직학사(樞密院 直學士)로서 동왕 9년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진사시(進士試)를 취하고 정몽주(鄭夢周)등 33인을 등용(登用)하였다.
 동왕 10년 직학사로서 다시 동북면 병마사로 나갔다. 그런데 이 해 10월에 홍건적 (紅巾賊)의 반성(潘誠),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파두반(破頭潘) 등이 20만 대군을 인솔하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에 침구(侵寇 : 침범하여 도둑질 함)하여 계속 남하하는 적병을 맞아 방어전(防禦戰)을 폈으나 끝내 이를 감당(勘當)치 못하고 패(敗)하여 왕은 안동(安東)에 파천(播遷 : 임금이 서울을 떠나 피난 감)하고 경도(京都)는 함락(陷落)되었다.   동왕 11년 공은 안우(安佑), 이방실(李芳實), 황상(黃裳), 김득배(金得培)등 여러 장군들과
더불어 20만 대군을 이끌고 경도를 탈환(奪還 : 도로 빼앗음)코자 사면(四面)으로 맹공(猛攻)하여 적의 괴수(魁首 : 악인의 두목)사유, 관선생 등을 참살(斬殺) 하니 적들이 저희끼리 서로 밟아서 죽고 얼어서 죽는 등 시신(屍身)이 성내에 가득하였고 참수(斬首)된 자가 십여만 명에 이르렀으며 적들이 원제(元帝)로부터 탈취(奪取)하였던 옥새(玉璽), 금보(金寶), 금은동인(金銀鋼印), 병기(兵器), 등을 노획하고 경도를 수복(收復)하였다.
 이듬 해 그 공으로 일등공신에 녹훈(錄勳)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陞進)되었으며 부모, 처에게는 삼계급(三階級)을 초월(超越)한 관작(官爵)을, 아들 1인에게는 7 품직을 선수(宣授)하고 자손들에게는 음직(蔭職)을 서임(敍任)하며 전(田)일백 결(結) 과 노비(奴婢)10구(口)등을 하사받았다. 이 해 원(元)나라가 덕흥군(德興君)을 세워서 왕을 삼고 요양성(遼陽城)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왔다. 공은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동북면도 지휘사가 되어 김 귀(金 貴)와 더불어 화주(和州)에 주둔(駐屯)하여 동북방(東北方)을 수비(守備)하고 있는데
그때 또 여진(女眞)이 변방(邊方)을 침략하였으므로 공이 홀면 병마사 전이도(全以道), 이 희(李 熙), 이용장(李用藏)등을 파견(派遺) 하여 이를 격퇴(擊退)하였다.
 북변(北邊)사람 김방괘(金方卦)는 이성계(李成桂)의 고모부(姑母夫)이다. 삼선(三善)과 삼개(三介)라는 두 아들이 있으니 여진(女眞)에서 성장하였고 체력과 용력이 범인(凡人)보다 뛰어났다. 덕흥군의 군병(軍兵)이 의주(義州)를 포위하고 선주(宣州)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키 위하여 이성계가 급히 진군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이성계를 감히 접근(接近)도 못하던 삼선과 삼개가 이 기회(機會)를 이용하여 여진을 유인(誘引), 화주 이북(和州 以北)이 모두 함락(陷落)되었다.
 그 당시는 국가가 좌우로 적군을 맞게 되고 연전연패(連戰連敗 : 싸움할 때마다 짐) 하니 장사(壯士)들이 전의(戰意)를 상실(喪失)하였다. 그러나 공은 군력(軍力)을 재정무(再整武 : 다시 전쟁 준비를 갖춤)하여 부하장병(部下將兵)을 진격(進擊)케 하고 이 성계도 김 귀 등과 함께 삼면(三面)으로 진공(進攻)하여 적을 대파(大破)하고 화주, 함주 등 실지(失地)를 완전 수복(完全 收復)하였다. 삼선과 삼개는 여진으로 달아난 후 돌아오지 못하였다. 왕은 이성계를 신뢰(信賴 : 믿고 의지함)하는 의지(意志)가 더욱 두터워졌고 공에게는 비단을 하사하여
그 공훈(功勳)을 포상(褒賞)하고 개환(凱還 : 싸움에 이기고 돌아옴)할 때는 내전(內殿)에서 연회(宴會)를 베풀고 축하하였다. 곧 이어서 서원군(西原君)을 봉(封)하였고 원나라에서는 홍건적을 토벌(討伐)한 공으로 봉훈 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 秘書監丞)을 선수하였으며 후일에 또 찬성사(贊成事)에 제수 (除授)하였다.
 동왕 20년 공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이 색(李 穡)을 정당문학으로 이성계를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삼으니 신 돈(辛 旽)이 주살(誅殺)되었을 때인지라 조정(朝廷)의 면모가 쇄신(刷新)되었다. 왕은 흡족(洽足)하여 측근신료(側近臣僚)들에게 “요사이 일반민중의 조정에 대한 평론(評論)이 어떠하던가”라고 하문(下問)하니 신료들은 “지금 국민들은 국정(國政)에 가장 적당한 인물을 얻었다고 기뻐합니다”라고 주답(奏答)하니 왕은 기뻐 웃으면서 이르되 “문관이나 무관을 모두 일류명사(一流名士)를 선택하여 재상(宰相)을 삼았는데 뉘라서
감히 이론(異論)이 있으랴”하였다.
 동왕 23년 자제위(子第衛)의 홍 륜(洪 倫)이 익비(益妃)와 통정(通情)하여 임신(姙娠)되었음을 내시(內待) 최만생(崔萬生)이 왕에게 밀고(密告)하니 왕은 자기의 소원이 성취되어감을 은근히 기뻐하면서 말하되“내일은 홍 륜을 죽여 이 비밀을 엄폐(掩蔽 : 보이지 않도록 가리어 숨김)할 것인데 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구나”하였다. 최만생과 홍 륜은 자신들의 삶을 위하여 선수(先手)를 써서 그날 밤 왕을 시해(弑害)하였다. 그 뒤 체포되어 국문(鞠問)에서 한 안(韓 安), 권 진(權 瑨), 홍 관(洪 寬), 노 선(盧 瑄)등도 동범(同犯)이라고
고백하니 한 안은 공의 둘째 아들이요 모두가 자제위소속이다. 한 안은 가혹(苛酷)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범행에 가담한 바 없다고 끝까지 불복(不服)하였으나 홍 륜 등의 일방적인 증언에 따라 동범이라 취급받고 홍 륜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공은 먼 곳으로 귀양가고 친속들도 유배되었다. 우왕 2년(1376) 집의 김승득(金承得)과 헌납 안 정(安 定) 등이 한 안과 노 선도 홍 관과 권 진 등과 동일하게 부모 처 자에게까지 극형(極刑)에 처하자고 주장하니 시중 이인님(李仁任), 찬성사 목인길(睦仁吉), 평의 변안렬(邊安烈), 정당문학 홍중선(洪仲宣), 문하시중 경복홍(慶復興)등은 그 당시 한 안과 노 선은 범행에 간여한 바 없다고 불복하였음에도 주살하였고 그 친속 을 원류(遠流)로 집행한 것을 이제 또 극형을 가중(加重)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역설(力說)하였으나 왕은 이에 따르지 않고
체복사 이 영(李 英)을 보내어 공을 참화(慘禍)케 하고 장남 호군공 휴(護軍公 休) 삼남 녹사공 녕(錄事公 寧) ,사남 렬(烈)등도 모두 참하게 하였다.
 공은 입조(立朝 : 벼슬을 함) 20여년에 홍건적, 여진 등의 침구와 우왕난정(禑王亂政)등의 내우외환(內憂外愚 : 나라안의 근심과 나라밖의 근심)이 격심(激甚)한 와중 (渦中 : 분란한 사건의 가운데)에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 이를 극복(克服)하고 누누(屢屢 : 여러번)히 큰 공을 세웠으나 일장춘몽(一場春夢 : 꾼 그때 뿐이고 꾼 후에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봄 밤의 꿈이라는 뜻)으로 덧없이 불우(不虞 : 미쳐 생각지도 못 함)의 참화(慘禍)를 당하였으니 천도(天道)가 무심(無心)치 않은가? 다만 불행중(不幸中)에도 장남 호군공 휴(休)와 3남
녹사공 녕(寧)의 후손들이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현달(顯達)하여 두 왕후(昭惠, 安順)가 탄생하고 부마(駙馬)가 두 분이며 경위재상(卿位 宰相)이 수십인(數十人)에 이르니, 이 모두 공의 적덕행의(積德行義)에 따른 응보(應報)로 생각된다.
 공은 당시 사문(斯文 : 유학)의 태두(泰斗 : 그 방면의 권위자)인 이목은(李牧隱), 정포은(鄭圃隱), 이초은(李樵隱)등과 문교(文交)하였으니 유시(遺詩)도 많으리라 생각 되지만 전래(傳來)한 것은 일구절(一句節)뿐 별로 없다.
 배위는 교하군 부인 노씨(交河郡 夫人 盧氏)이니 판서공(判書公 : 신일운재신이信一云宰臣怡)의 따님이다. 슬하에 5남 3녀를 생육하였으나 장남, 차남, 삼남, 사남은 화를 입었고 오남 판윤공 임(判尹公 : 任)만이 연소(年少)하였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
 공의 묘소(墓所)는 장단(長湍) 세곡산 소재(細谷山 所在) 사숙 공묘(思肅公墓) 안산(案山)에 있다 혹은 실호(失護)되었다 등의 전후구보(前後舊譜)의 기록이 모두 다르다. 장단 세곡은 현재 완충 지대이므로 이를 확인할 수도 없고 하여 고양시 내유동(13세 참의공파 한 전)단역내(壇域內)에 제단 (祭壇)을 설치(設置)하고 제사를 봉행하다가 2012년에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에 서원사(西原祠)를 건립하여 매년 음력 3월 13일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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