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은군 한배하(淸恩君 韓配夏 : 효종 1년(1650~경종 2년(1722) 23世)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하경(夏卿), 호는 지곡(芝谷), 판관공 증 판서(判官公 贈 判書 : 聖翼)의 아들로 청원군(淸原君 : 聖輔)에게 계후입양(系后入養)되었으며 청흥군(淸興君 : 壽遠)의 손자가 되고 친어머니 증 정부인 한산 이씨(韓山 李氏)는 참봉공 준성(參奉公 畯成)의 따님이다.
명재(明齋 : 尹拯)의 문하(門下)에서 수학(受學)하고 숙종 19년(169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사간원 정언(正言) 등을 거쳐 동왕 32년(1706) 홍문록(弘文錄)에 오르고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제수되었으며 동왕 34년(1708) 동래부사(東萊府使). 이듬 해에 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동왕 45년(1719)에 청평부원군 응인(淸平府院君 應寅)의 작위를 이어받어 청은군(淸恩君) 에 습봉(襲封)되었고 70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 : 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낸 사람으로서 나이가 70세 이상이어야 했다)에 들어갔다. 이어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를 거쳐 경종 2년(1722) 공조판서(工曹判書)로서 알성문과 독권관(讀券官 : 시험을 감독하고 글장을 채점하는 등의 시험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1월 3일 별세하니 왕(王)은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고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세제이사지경연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弟二師知經筵弘文館大堤學藝文館大堤學知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總管)에 추증하였다.
공은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관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특히 동래부사 재임시 백성들이 선정(善政)의 혜택(惠澤)에 흡족(恰足)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초상(肖像)을 모시고 매년 제사를 모시면서 공의 명예(名譽)를 후세(後世)에 전하도록 하였다. 지금은 도시개발(都市開發)로 철거(撤去)되었으나 동래읍지에는 지금까지도 <동래부사의 잊어버린 젖가락>이란 전설이 있고 KBS방송국에서도 전설의 고향에서 방영한 바 있다. 전설의 내용은 생략한다.
배위는 세 분인데 증 정경부인 연안 이씨(贈 貞敬夫人 延安 李氏)는 참봉공(參奉公 : 悟)의 따님이고 전주 리씨(全州 李氏)는 사과공(司果公 : 惟一)의 따님이며 밀양 박씨(密陽 朴氏)는 호군공(護軍公 : 纘業)의 따님이다. 6남 5녀를 생하니 장남은 문과 주서공(文科 注書公 : 師孟)이요 차는 현감공(縣監公 : 師喆)이고 차는 문과 대사간공(文科 大司諫公 : 師善)이며 차는 사경(師敬), 차는 첨지중추부사공(僉知中樞府事公 : 師謹), 차는 심원공(心原公 : 師愿)이다.
1982년 8代孫 甲洙 父子(相宰, 相彦)의 헌성(獻誠)으로 建造하였다.
정읍 종중(井邑 宗中)에서는 이런 갑수의 성의를 보고 홍석(洪錫), 현석(玄錫), 종석(宗錫),옥석(玉錫)을 위시하여 전종중이 자진하여 1982년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수립(竪立)하여 같은 날 제막식(除幕式)을 거행(擧行) 하였다.
 
 位置: 菁陽郡 定山面 光生里
 歲享日: 陰)10月 13日
 
번호     이 름 조회
1 한방신 4605
2 한휴 3462
3 한계복 2981
4 한창 3742
5 한백륜 3936
6 한경석 3805
7 한후기 3473
8 한숙륜 3573
9 한녕 3639
10 한영정 4744
11 한확 3566
12 한치인 4061
13 한호문 2906
14 한인급 3559
15 한배하 4015
16 한사득 3832
17 한사직 3524
18 한광조 3114
19 한광회 3541
20 한광경 3704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