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공 한사직(靖惠公 韓師直 : 숙종 21년(1695)~정조 2년(1778) 24世)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온(汝溫), 호는 소곡(巢谷), 정선공(旌善公 : 配厚)의 아들로 증 참찬공(贈 參贊公 : 配淵)에게 계후입양(系后入養)되어 증 참판공(贈 參判公: 聖龜)의 손자가 된다.
이 재(李 縡)의 문인으로 경종 1년(172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서 수학하다가 음보(蔭補)로 여러 관직을 거쳐 정선군수(郡守), 정랑(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영조 30년(1754) 60세의 고령(高齡)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고 이어 사간원 헌납(獻納), 사헌부장령(掌令) 등을 역임한 후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
이 때 관동지방(關東地方)에 대기근(大飢饉 : 흉년으로 곡식이 없어 굶주림)이 들자 공의 녹봉(祿俸)에서 진휼(賑恤 :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여 도와줌)하는 등 성력(誠力)을 다하여 수천 명의 기민(飢民)을 구제한 바 있어 그 치적(治述)을 인정받아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동왕 39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으나 경연관(經筵官)으로서 경연(임금의 학문을 닦기 워하여 신하들 중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불러 학문을 강론하게 하던 일)에 불참하였다하여 원주(原州)에 유배되었으나 이듬 해 풀려나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고 그 뒤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충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8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등 영조로부터 우로(優老)의 은전(恩典)을 입었다.
정조 2년(1778) 졸하니 향년 84세다. 왕은 부음(訃音 :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기별)을 듣고 예관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고 시호(諡號)를 공간(恭簡)으로 내렸다가 후일에 정혜(靖惠)로 개시(改諡)하였다.
배위 증 정경부인 전주 리씨(全州 李氏)는 전산군(全山君 : 深)의 따님이다.
슬하에 1남 2녀를 생하니 아들은 중고공 태모(仲皐公 泰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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