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공 한광조(忠貞公 韓光肇 : 숙종 41년(1715)~영조 44년(1768) 25世)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시(子始), 호는 남애(南厓), 봉조하공(奉朝賀公 : 師得)의 아들로 진사공 증 찬성(進士公 贈 贊成 : 配商)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반남 박씨(潘南 朴氏)는 필선공(弼善公 : 泰昌)의 따님이다.
영조 14년(1738)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 19년(174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곧바로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이어서 지평(持平), 사서(司書)를 역임하였다.
동왕 23년(1747) 영남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재물을 함부로 사용한 경상좌수사와 진제곡(振濟穀 : 구제양곡)을 지나치게 허비한 전 경주부윤 정모(鄭某)와 소를 사사로이 매입한 홍해군수 김모(金某) 등의 죄상(罪狀)을 보고하고 선치수령(善治守令)으로는 사천현감 이사순(李思順)에게 포상(褒賞)할 것을 건의하였다.
동왕 25년(1749)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수찬, 지평, 교리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호서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세금이 불공평하게 징수되고 있음을 보고하고 그 시정을 건의하였다.
동왕 29년(1753) 도청(都廳)을 거쳐 경기우도 심휼사(京畿右道 審恤使)가 되어 백성들의 억울한 옥살이와 기근 상황 등을 살피고 돌아왔다. 이듬 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나라에 진상하는 삼(參)의 양(量)이 과중함을 들어 경작하는 밭의 평수에 따라 징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동왕 32년(1756)에 승지(承旨), 동왕 36년에 대사간(大司諫), 이듬 해 이조참의(吏曹參議)등을 거쳐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 때 왕세자(王世子 : 壯獻世子)를 죽이려 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다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곧 홍산(鴻山)으로 옮겼다. 동왕 38년(1762)에 풀려나 다시 승지에 기용(起用) 되었으며 이듬 해 도승지가 되고 동왕 42년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동왕 44년에 공이 별세하자 영조는 지난 날의 일을 후회하고 탄식(歎息)하는 내용의 제문(祭文)을 내려 애도하고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에게 공의 상기(喪期)가 끝나기를 기다려 그 아들을 기용하여 공의 혼을 위안하도록 명하였다.
정조 13년(1789)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배위 정부인 동래 정씨(貞夫人 東萊 鄭氏)는 군수공(郡守公 : 錫徵)의 따님이다.
슬하에 4남을 생하니 장남은 대흥공 증 이조판서(大興公 贈 吏曹判書 : 重裕)요 2남은 옥천공(沃川公 : 弘裕)이며 3남 첨지주중추부사공(僉知中樞府事公 : 道裕)이요 4남 증 참의공(贈 參議公 : 忠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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