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공 한광회(判事公 韓光會 : 숙종 41년(1715)~정조 16년(1792) 25世)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문숙(文叔), 호는 우헌(愚軒), 청산공(靑山公 : 師德) 증 찬성의 아들로 진사공(進士公 : 配商) 증 찬성의 손자이며 어머니 증 정경부인 전주 리씨 (全州 李氏)는 대사간공(大司諫公 : 彦經)의 따님이다.
영조 14년(1738) 식년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 수찬, 사서(司書), 지평(持平), 헌납(獻納), 필선(弼善), 응교(應敎), 집의(執義), 사간(司諫)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동왕 29년 동부승지, 동왕 33년 대사성, 동왕 34년 이조참의, 동왕 38년 한성부좌윤, 동왕 39년 동부승지, 동왕 41년 대사헌, 동왕 42년 경기도 관찰사, 동왕 44년 형조판서, 동왕 45년 이조판서, 대사헌, 동왕 46년 예조판서, 대사헌, 동왕 47년 한성부판윤, 동왕 48년 대사헌, 동왕 49년, 이조판서, 대사헌, 동왕 50년 이조판서, 동왕 51년 함경도 관찰사, 동왕 52년 의정부 우참찬, 정조 2년(1778) 판의금부사, 동왕 6년 숭록대부 판의금부사, 동왕 8년 다시 판의 금부사가 되고 70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 뒤에 형조판서, 판의금부사, 의정부 좌 · 우참찬을 지내고 동왕 14년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판의금부사를 지내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동왕 16년(1792)에 졸하니 향년 78 이다. 조정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예관을 보내여 치제(致祭)하였다.
공은 영조 및 정조조에 76세 노령에 이르기까지 요직(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면서 공무에 바쁜 중에도 대소종사(위선사)에 참여하고 시조부군의 신도비문도 공이 썼다.
배위는 정경부인 동래 정씨(東來 鄭氏)이니 봉사공(奉事公 : 錫敷)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생육하니 장남 여량공(汝良公 : 最裕)은 백부(伯父) 진사공(進士公 : 光世)에게 계후입양(系后入養)되었고, 2남은 여철공(汝哲公 : 明裕)이며 3남은 판사공(判義禁府事 : 晩裕)이다.
 
判事公(韓 光會) 貞敬夫人 東萊 鄭氏 合폄
位置 : 靑陽郡 南陽面 興山里
歲享日 : 陰 10月 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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