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공계(少卿公系)

 
태학사 한광연(太學士 韓光衍 : 毅宗 7年(1153)~高宗 24年(1237) 8世)
고려 명종(明宗) 고종(高宗) 때의 문신이다.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판공부사정간공 윤(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判工部事 貞簡公 綸)의 아들이며 상서좌복야 안중(尙書左僕射 安中)의 손자이다.
약관의 나이에 근시(近侍)로서 수궁승(守宮丞)에 보직되어 강화도(江華島) 마정(馬政)을 주관하였다. 명종 21년(1191) 과거에 급제한 후로 중상승(中尙丞)으로 전직되고 그 후 왕이 불러 공에게 승과 조계종(僧科 曹溪宗) 선발을 감시(監試)하게 하였다. 대 창령(大倉令)을 거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에 이르렀다.
동왕 26년(1196) 최충헌(崔忠獻)이 왕에게 청하여 공을 경주에 보내 앞서 주살(誅殺)된 이의민(李義旼)의 3족을 없애게 하였다. 몇년 후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나갔는데 선정(善政)하여 도처에서 백성들이 칭송하였다.
그 후 병부랑중(兵部郞中)으로 삼았으며 금(金)나라 사신이 왔을 때 반행(伴行) 함에 예의에 맞아 호평(好評)을 받았다.
이어 예빈시소경(禮賓侍少卿)에 천거되어 국자사업 사관수찬(國子司業 史館修撰)을 역임하였다. 그 후 중대부태복경(中大夫太僕卿)에 시보(試補)되어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전임하였다. 조정에서는 외직(外職)을 중히 여겨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천거하였다.
고종(高宗) 6년(1219) 몽고의 용장(勇將) 합진(哈眞)이 우호관계를 맺기를 요구할 때 그 누구도 가기를 꺼렸으나 공이 지 병마사(知 兵馬使)로서 김취려(金就礪)와 함께 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후에 요병(僚兵)을 여러 차례 격멸한 공(功)이 있어 은청관록대부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학사 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 副使 禮部尙書 翰林學士 承旨)에 승진하고 고종 7년(1220) 지공거(知貢擧 : 고려 때 과거를 보이던 考試官)가 되어 예위(禮위 : 禮曹)를 맡기도 하였으며 서경(西京)에 재제사(齊祭使)로 가기도 했다.
다음 해 동지추밀원사 호부상서(同知樞密院事 戶部尙書)가 되고 1222년 추밀원사 이듬해 보문각 태학사(寶文閣 太學士)가 되었다.
고종 11년(1224) 추밀원부사로서 다시 지공거가 되어 진사(進士)를 취하고 손 완(孫 琮) 등 33인을 뽑았다.
임종(臨終)에 이르러 상사(喪事)에 앞서 번거로운 것은 삭제하라 하였다. 83세로 졸하나 아들이 없었다. 묘지명(墓誌銘)은 《고려묘지명집성(高麗墓誌銘集成)》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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