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공계(少卿公系)

 
문열공 한안인(文烈公 韓安仁 : ?∼睿宗 17年(1122) 6世)
고려 숙종(肅宗), 예종(睿宗) 때의 문신이다. 초명은 교여(교如). 자는 자거(子居)이다. 호부시랑 규(戶部侍郞 圭)의 아들이며 정종 국구 조(靖宗 國舅 祚)의 손자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예종의 잠저(潛邸 : 天子가 아직 卽位하기 前에 있던 邸宅)에 있을 때 공은 이 영(李 永), 이여림(李汝霖) 등과 함께 동궁관(東宮官)이었으므로 즉위한 뒤에 형제, 친척이 요로에 많이 등용되었다.
벼슬은 예종 때에 우부승선(右副承宣),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형부상서, 예부상서, 지추밀원사 등을 역임하였고, 인종이 즉위한 뒤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에 올랐다.
예종 7년(1112)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1120년에는 지 공거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권력을 독점하려던 이자겸(李資謙) 일당은 선왕, 즉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보(帶方公 보)를 비롯해서 문공미(文公美), 이영, 정극영(鄭克永) 등 50여명을 살해 혹은 유배하였는데 이때 공이 승주(昇州) 감물도(甘勿島 : 順天)에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인종 때 이자겸 일파와 한안인 일파의 대립은 누대문벌과 신진 관료세력과의 대표적인 대립 현상이었다. 후일 인종이 즉위하여 그의 내외손과 현손에게 관직으로 포상할 것을 교서로 내렸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공은 힘써 공부하여 글을 잘 지었다. 또 역서(易筮 : 점치는 일)에 능하여 앞 일을 잘 알아 맞추니 일시(一時)에 명류(名流)가 되었다. 아들은 기록(記錄)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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