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열왕후(仁烈王后 : 1594~1635  20世)
인열왕후는 인조대왕비(仁祖大王妃)이다.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준겸(浚兼)의 따님이요, 또한 영의정으로 추증된 효윤(孝胤)의 손녀이니 다음의 유사(遺事)를 통해서 자세히 소개한다.
 
인조대왕비 인열왕후 유사(仁祖大王妃 仁烈王后 遺事)
仁祖는 두 王后와 후궁(後宮)을 거느리고 六男一女를 두었다. 仁烈王后 淸州 韓氏는 호조판서(戶曹判書)로서 선조(宣祖)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사람으로 광해군(光海君) 5年(檀紀 3946 · 西紀 1613)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전리방귀(田里放歸)되었다가 유배(流配)된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宣祖 27年 (檀紀 3927 · 西紀 1594) 7月 1日에 出生하였다.
光海君 2年(檀紀 3934 · 西紀 1610) 17歲의 나이로 능양군(綾陽君)이던 仁祖와 가례(嘉禮)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封)해지고 光海君 15年(檀紀 3956 · 西紀 1623)에 綾陽君이 反正을 일으켜 王으로 즉위(卽位)하자 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그러나 정묘호란(丁卯胡亂) 등으로 내외의 어려움을 겪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1年 前인 仁祖 13年(檀紀 3968 · 西紀 1635) 12月 9日에 향년 42歲로 승하하였다.
뒤에 仁烈의 시호가 올려지고 또 정유(正裕)의 휘호가 더해졌으며 孝宗 2年(檀紀 3984 · 西紀 1651)에 명덕정순(明德貞順)의 휘호가 추상되었다.
신위(神位)는 종묘(宗廟)의 正殿 第八室에 배향(配享)되어 있고 능(陵)은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坡州郡 炭縣面 葛峴里)에 있는 장릉(長陵)에 仁祖와 합장(合葬)되어 있다.
소생은 四男을 두니 長男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이고 次男은 孝宗大王이며 三男은 인평대군 묘(麟坪大君 묘)이고 四男은 용성대군 곤(龍城大君 滾)이다.
다섯번째로 아들을 出産하였으나 2日만에 요절(夭折)하였다.
 

인열왕후 애책문(번역문)

※주 : 임금 또는 왕비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글

仁烈王侯 哀冊文(譯文)
유세차 숭정팔년 을해년(維歲次 崇禎8年 乙亥年)(仁祖 13年 檀紀 3968  西紀 1635) 12月 初 9日에 大行王妃께서 창경궁(昌慶宮)의 산관(産館 : 궁중의 아이를 분만하기 위해 마련한 산실청(産室廳)에서 승하하시매 아무 전각에 殯所를 모셨다가 이듬 해로 넘겨 아무달 아무날에 장릉(長陵 : 경기도 파주 교하에 있는 인조대왕과 그 비의 능)으로 천좌(遷座)하여 모시니 이는 예이옵니다.
궁정에 차린 조연(祖筵 :  발인제의 차림을 말함)이 거두어지니  빈전(嬪殿)의 장막은 텅비워지고 三宮에서 뇌성과 같은 곡성이 진동하며 백령(百靈)이 용을 쫓는 구름과 같이 따르고 눈물을 자아내는 바람이 쏘아대매 만가(挽歌)의 흐느낌이 애달프옵니다. 새벽 이슬의 울음에 명정(銘旌)이 젖는데 궁거(宮車 : 임금의 상여)는 더위 잡을 길이 없고 저승길을 따라 갈 길이 없사옵니다.
주상전하께옵서는 갑옷을 들어 보시고는 그 공덕을 생각하시고 옛 궁검(弓劍)을 보시고는 정회(情懷)에 얽히시면서(갑옷과 궁검은 오아권을 상징하는 임금의 일용 의장품의 뜻이 있음) 닭이 울음소리로 새벽을 일깨우는 것 같이 규간(規諫)하시던 내조의 추감(追感)에 사로 잡히사 적불(翟불 : 꿩의 깃무늬로 장식한 왕비의 상여)를 어루만지시며 상통(傷通)을 더하시더니 아름다운 장전(章典)을 상고하여 훌륭하신 성망을 드날려 드리라 하시니 받들어 지어 올리는 말씀은 다음과 같사옵니다.
저 울창한 西原(청주의 옛 이름으로 왕비의 성인 淸州 韓氏의 본관이다)에 사록(沙麓 : 앞의 시책문 참조)이 오랜 상서를 저장하여 성녀(聖女)를 독생(篤生)하니 동방의 국모가 되시었습니다.
안온하신 문채로 예철(睿哲)의 배필이 되시어 공순하고 자혜로우심으로 도와서 이루시며 아름다움을 승습하여 빛이 거듭나게 하시니 해와 짝을 이루어 밝으셨습니다. 선조대왕의 말년에는 애석하게도 연좌(連座)되어 탄식을 일으키시더니 「왕후의 아버지 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宣祖 22年(檀紀 3922 · 西紀 1589)에 당시 금천현감으로 재직 중에 앞서 역모자 정여립(鄭汝立)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일로 연루되어 투옥된 일을 말함,
그 뒤 왕후는 光海君 2年(檀紀 3943 · 西紀 1610)에 잠저시절의 인조대왕 능양군과 결혼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이 되고 光海君 5年에는 또 아버지 한준겸이 대신으로서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수난을 당함」 이후로는 다시 신손(神孫 : 선조의 어린 적자 영창대군을 말함)을 도우라는 명을 받고 「한준겸이 선조대왕이 영창대군에 대한 뒷일을 부탁 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하나가 된 것을 말함」 또한 석원(碩媛 : 크게 훌륭한 여자)을 구하시는 은사(恩思)를 입던 터에 오직 우리 왕후께서 예를 갖추어 탄강하시었던 고로 이에 간택을 받으시니 훌륭히 세선(世選 : 대를 이어 한 집안에서 국혼을 이루는 선택에 드는 것을 이룸)을 이루시었습니다.
잠저(潛邸)로 빈(嬪)이 되어 들어오시니 이야말로 좋은 짝을 이루셨는데 옥과 같은 체도(體度)에 연충(淵沖)히 사려 깊으시고 맑고 신중하신 몸가짐에 꽃다운 계책을 지니었습니다. 화목하고 조용히 익히신 內則으로 윗분들을 공경하고 삼가며 어버이의 장악(長樂)을 기쁨으로 받드니 칭예가 두드러져 햇빛처럼 밝았습니다.
나라가 否運을 맞나 매운 화란이 궁궐 안 왕족에게 미치니 윤리와 기강이 희미하게 꺼지고 천지는 어둠에 싸였으며 종묘와 사직은 나부끼는 깃발처럼 위태롭고 검은 머리의 백성들은 도탄에 허덕였습니다. 천제(天帝)가 마음을 고쳐 도모하여 큰 덕망을 지닌 이가 간택을 받으니 그 영걸스런 계모(計謀)를 안에서 도와 주 무왕의 열 사람의 현신의 하나가 되매 육룡(六龍 : 임금의 수레를 끄는 여섯 마리의 용마로서 어가를 뜻함)에 때를 맞춰 오르심이고 황상(黃裳 : 정실부인 또는 왕비의 정위)에 오르사 크게 길함을 비롯하시게 되었습니다.
前星(앞에 반짝이는 작은 별로서 세자를 말함)은 환연히 빛나고 인지(麟趾 : 번성하게 태어난 왕자군들을 지칭함)가 떠올라 노래를 부르니 왕가와 나라가 서로 편안하고 크고 작은 것이 함께 화합을 이루었습니다.
중궁의 높은 지위에서 존영(尊榮)을 누리심이 十三年에 이르도록 관휴(關雎 :『시경』에 나오는 물수리로서 주 문왕의 비 태사(太사 : 周文王의 妃)와 같이 정숙하고 금슬이 좋은 부인을 상징함)의 화락이 넘치니 이는 전고에 짝할 바가 없는 일이었는데 어쩌다 하루 저녁에 재앙의 기운이 문득 이르러 영대(靈臺 :  천문대)가 요얼한 기운을 고하고 태사(太史 : 고대에 天時와 星曆을 맏은 관원)가 재앙을 기록하기에 이르렀을까. 갑관(甲觀 : 동궁)의 서당에 나가시면 여러 아들들에게 경사를 빌어 베푸셨건만 순간에 햇볕같은 복록이 재앙에 걸리시매 하룻사이에 命이 없어지심을 애통해 하옵니다. 寢위(궁중의 금달)는 다시 회복이 안되는데 신선의 수레는 급거히 오르시옵니다. 어찌 人事가 불량한 것이오니까. 아니면 하늘의 역수(曆數)를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옵니까. 오호라 애통하옵니다.
아침의 풀잎에서는 이슬이 마르더니 주차(舟車)는 움직여 밤의 골짜기로 들어가옵니다. 용순(龍순 : 임금의 상여)에 한번 멍에가 메어지니 영구히 적막한 수원(壽原 : 묘지의 언덕)에 이르시옵니다. 물은 슬픔을 머금은 채 골짜기에서 나오고 산은 처참함을 띠고 봉우리를 연이었습니다. 솔바람은 보배로우신 비파를 울리는 것만 같사옵고 參燈(궁중의 있는 많은 외등들)이 없어 어두우니 은등잔의 불빛도 없사옵니다. 평생의 기거하심과 다르니 전날의 목소리와 용모도 아니계시옵니다. 오호라 애통하옵니다.
상단(桑壇 : 궁중의 뽕나무를 심은 곳)에는 초목이 시들어 죽었고 견관(繭館 : 궁중의 왕비가 몸소 누에를 치던 곳)에는 먼지가 쌓였습니다. 입으시던 玉衣는 헛되이 설해져 있고 쓰시던 금옥(金屋)의 집 문은 누가 열게 되오리까. 겨우 섣달의 납설(臘雪)이 희끗희끗하게 덮일 때 돌아가시었는데 어느덧 초봄의 매우(梅雨) 자욱히 내리옵니다. 차라리 월전(月殿 : 지상의 왕비의 궁전을 말함)에서 조금씩 관망하심으로 족하실 것을 어찌 요지(瑤池 : 곤륜산에 있는 여신선 서왕모가 노니는 상상 속의 연못)에 바짝 가서 노닐고자 하시옵니까. 흰구름을 바라봄이여 이미 아득히 멀어지시었고 동관(동管 : 글을 잘하는 문신)의 글줄에 머무는 것은 남은 슬픔이옵니다. 오호라 애통하옵니다.
주구(株丘 : 무덤의 언덕)는 능히 훌륭하고 백성(栢城 : 묘역)은 두루 아름답습니다. 현구(玄龜 : 신비한 거북으로 점침을 상징)가 맞추어 복지(卜地)를 하였으니 금낭(錦囊 : 좋은 시를 넣은 비단 주머니란 뜻으로 당대의 시인 묵객을 말함)도 그 기량이 달려 기릴 수가 없겠사옵니다. 하늘이 아껴 두고 땅이 감춘 것을 발견했으니 봉황이 분분히 춤추며 날고 용이 서린 형국입니다. 이 천혜의 땅에 장렴(粧렴 : 화장품 상자와 뜻으로 왕후의 체백을 말함)을 갈무리하심에 형패(珩패 : 패옥의 소리로서 왕비의 생전의 거동소리)가 언덕산에 가리워졌습니다. 안개서린 산색의 봉우리들이 열지어 시중하듯 늘어 있나니 부온(富온 : 부유한 할미인 토지신)에게 의탁하여 금안(金安)을 누리소서. 오호라 애통하옵니다.
차오르고 비는 것과 사라짐과 삶은 天道의 큰 경영이온지라 흐르는 냇물은 그침이 없고 가는 날짜는 멎지 아니하옵니다. 아아, 인생이 모두 이 안에 속해있음이여. 누구의 수명이 저 뫼언덕과 같이 장구하오리까. 오로지 덕음(德音)은 어두워지지 않음이여. 이 란장(蘭藏 : 난초와 같은 숭고함을 갈무리한 것의 뜻으로 묘소를 지칭함)과 한가지로 더욱 꽃다우소서. 감히 애달픔을 기술하면서 먼 후일 내다봄이여. 만년을 그렇게 드리워 다함이 없으시옵소서 오호라, 애통하옵니다.
                사헌부대헌 신 김상헌 찬(司憲府大司憲 臣 金尙憲 撰)
 

인열왕후 시책문(번역문)(仁烈王侯 諡冊文)

※주 : 王이나 王妃의 시호(諡號)를 올릴 때 생전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지은 글)
국왕이 말하노라. 한 사람 좋은 보좌를 잃으니 바야흐로 죽음을 슬퍼하는 정이 절실하여  옛날에 여러 전장(典章)을 상고하고 이로써 그 덕을 빛내는 의전을 거행하고자 실제 여론에 두루 좇는 바이니 어찌 〔다른 본에는 「이 어찌」의 기시(豈是)를 「감히 용납 하랴」 의 뜻인 감용(敢容)으로 썼음〕 사사로운 정에서 나온 말씀이리오.
오로지 생각컨데 大行(임금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시호를 올리기 전에  쓰는 접두어)한 왕비는 바탕이 원래 仁明하고 성품은 오직 사려깊고 고요하였던 바 사록(沙麓 : 상고시대 중국 晋나라에  있던 산으로 이 산이 무너진지 六百年 뒤에 帝곡의 비가 태어남)의  운수가 응감하여 덕을 쌓은 가문에서 탄강(誕降)하였도다. 위수(渭水 : 주나라 문왕이 태사(太사)를 비로 맞이한 곳)에서 상서를 정하니 찬녀(纘女 : 조상의 업을 이어받은 여자의 뜻으로 문왕비를 일컫는 말)의  천명을 찬양하는 노래가 퍼지고 일찍이 도산씨(塗山氏 : 하나라 禹임금의 비)의 내조로써 도우니 오래도록 상야(商野 : 상은 중국 고대의 상나라를 말하고 야는 당시 왕성 밖에 있던 공경대부의 采地를 말함. 즉 궁실의 王子君 처지에 있던 인조의 잠저 시절을 일컬음)에서의 노고를 함께 하였도다. 혼미하고 난폭한 군주가 이륜(彛倫)을 깨뜨리고 막는 때에 종사를 위해 의리를 일으켜 집안을 변하여 나라를 만들기에 이르러서는 한 차례 큰 병장기의 싸움에서 함께 돕는 공훈을 세웠고 그 계책을 밀찬(密贊)한 재주는 실로 주 무왕의 열 사람 현신보다 어려운 일을 해내고 곤극(坤極 : 중전의 지위)에 그 위호를 바루어서는 풍속과 교화가 그 기틀을 잡게 되었도다.
대비를 섬김에는 그 안색을 살펴서 받드니 정성과 예법에 차이가 없고 무릇 그 內治의 도리는 하나같이 옛사람의 가르침으로써 스승을 삼았으며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는 것은 잠저(潛邸 : 동궁을 거치지 않은 임금의 못속에 잠긴 용같이 있던 시절)에 있던 날과 같았도다. 겸손과 仲淵히 침착한 마음으로 스스로 거느리니 어찌 척완(戚완 : 왕비의친정)과의 사사로움인들 있었으리오. 때가 더욱 어려운 간난을 만나서는 거듭 얇은 얼음을 밟는 두려움을 지니면서 나를 보필하되 늘 못 미치는 것 같이 하였고 항상 복주지규(覆舟之規 :  배가 뒤집히는 것 같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규간하는 것)로써 일깨우는 바가 절실하였도다.
그리하여 이미 호정(壺政 : 대궐 안을 다스리는 것)이 화목하게 이루어짐이 나타나니 능히 나랏사람들의 느껴 우러름을 받고 하늘의 보우가 크고도 두터워 자식을 많이 두는 것은 종사(종斯 : 메뚜기인데 『시경』에 나오는 자손이 그 처럼 번성하는 것을 뜻함)에 비교되고 인화(人化)는 순수하고도 심원하여 공성(公姓 : 왕족을 말함)은 마땅히 인지(麟趾 : 『시경』에 나오는 말로 공자(孔子)에게 신의와 후덕이 넘쳐 공족이 성함을 이름)를 노래하기에 이르렀도다.
무강한 장수를 일컬음에 있어 어찌 불숙(不淑)한 슬픔이 있을 것을 뜻하였으리오. 자관(자棺 : 산뽕나무의 물감인 자황(자黃)의 관이란 임금의 재궁(梓宮)을 말함)의 재앙을 만나니 문득 육의(六衣 : 왕비의 여러 예복)를 말아넣는 것에 놀라고 초도(椒塗 : 왕비의 침전길)에 시위(侍衛)가 느슨해지니 드디어 여러 선후(先后)들의 진유(眞游 : 영혼의 유영과 같은 여행)를 좇음이로다. 용모와 음성이 길이 엇갈려 떠났음을 슬퍼하나니 그 덕과 의범을 회상하되 미칠 길이 없으며 궁궐의 밤이 적막하니 누가 잠간(箴諫 : 바늘로 찌르는 깨우침과 같은 규간)으로써 내게 다시 들려 줄 것인가.
동관(동管 : 붉은 붓대를 받은 문신 또는 그 글)이 휘황하니 장차 고운 영예가 영구히 드러날지어다. 영진(靈辰 : 장례날짜)은 머물지 아니하니 이미 영원으로 나아갈 기약이 박두하였도다. 서민은 어찌 의지할지을 몰라 모두 한결같이 친상을 당한 듯 애통하는도다.
오로지 이에 춘추(春秋)의 장례지내던 고사에 따라 마땅히 이름을 바꾸는 바가 있어야겠거늘 하물며 지금 이같이 유한(幽閑)하고 정정(貞靜)한 의범으로 스스로 능히 은혜로운 절목을 받아 합당함에 있어서랴. 〔다른 본에는 「스스로 능히…합당하다」 대신에 가히…함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갖춘 예식을 이제 올리자니 이 침통함을 어찌 다 할 수 있으리오. 지금 신 의정부 영의정 윤방(尹昉)을 보내 옥책(玉冊)을 받들고 시호를 증(贈)하게 하여 가로되 仁烈이라 하노니 바라건데 맑은 영혼은 이 현호(顯號)를 받아들여 신후(神后 : 천신의 후비)와 짝을 이루면서 복택을 만년토록 유전(流傳)시켜 내려주고 〔이곳의 복택을 어떤 본에는 경렬(景烈)이라 했다.〕후손에게 경유(慶裕)를 드리워 주어 본손과 지손이 백세토록 번창하게 할지어다. 슬프고 애통하도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신  조 익 찬 (臣 趙 趙 翼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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