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록(王妃錄)

 
신의왕후(神懿王后) 1337~1391 11世)
조선 태조(朝鮮 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원비(元妃)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는 이태조(李太祖)보다 2년 연하(年下)로서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5년(단기 3670 · 서기 1337) 9월에 고려(高麗)의 동북지방(東北地方) 영흥(永興) 땅에서 탄생하였다. 아버지는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휘 경(諱 卿)이다.
신의왕후(王后)는 이태조(李太祖)가 개국(開國 : 朝鮮開國)하기 한 해 전인 고려 공양왕(恭讓王) 3년(단기 3724, 서기 1391) 9월 23일에 수(壽) 55歲로 승하(昇遐)하였다. 그후 이태조(李太祖)가 개국(開國)하자 절비(節妃)로 추봉(追封)하였다가 다시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追尊)되었다. 신위(神位 : 神主 : 位牌)는 종묘(宗廟)의 정전(正殿) 제1실에 봉안(奉安)되어 있고 능소(陵所)는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京畿度 開豊郡 上都面 楓川里)에 있는 제릉(齊陵)으로 왕후(王后) 홀로 안장(安葬)되어 있다.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한말(韓末)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왕(王)을 황제로 칭제(稱帝)하고 건양 원년(建陽 元年 : 서기 1897)으로 고치면서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追尊)되었고 뒤에 승인순성(承仁純聖)의 존호(尊號)가 추상(追上)되었다.
신의왕후(神懿王后)가 6男2女를 탄육(誕育 : 낳아 기름)하니 長男은 진안대군(鎭安大君)방우(芳雨)이고 次男은 정종대왕(定宗大王 : 2代王)이요 3男은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요 4男은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芳幹)이요 5男은 태종대왕(太宗大王 : 3代王)이며 6男은 덕안대군(德安大君) 방연(芳衍)이다. 장녀(長女) 경신공주(慶愼公主)는 찬성사 이 정(贊成事 李 佇)에게, 2女 경선공주(慶善公主)는 청원군(靑原君) 심 종(沈 淙)에게 하가(下嫁 : 시집감)했다.
 
신의왕후(神懿王后) 옥책문(玉冊文)
임금, 왕비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때 옥책(玉冊)에 새긴 송덕문(頌德文)
지극하신 은혜를 길이 생각하매 감창(感愴)의 느낌을 이길 수가 없어 아름다운 칭호(稱號)을 더하여 올리고자 하는 바 이는 오로지 옛 장전(章典)을 경건히 계고하여 그에 따라 존숭을 극대히 하는 것이오며 이로써 간절한 효성을 펼치는 바이옵니다. 공손히 생각컨데 신성하고 훌륭하신 천품(天稟)의 자질로써 심성을 잡아 순승(順承)하시니 그덕(德)이 건원(乾元 : 큰 하늘과 으뜸이자 창업주로서의 부군인 태조를 가리킴)에 협화함이 마치 도산씨(塗山氏 : 夏의 시조 禹임금의 妃)가 우 임금의 배필이 되어 왕도(王道)가 완전하고 항길(恒吉)하게 된 것과 같고 태사(太사 : 周 文王(주 문왕)의 비)가 주 나라의 국모가 된 것과 가지런히 되시어 자식을 가르치는 대의의 방정(方正)함을 엄히 하시고 저 아래까지 미치는 인덕과 은혜를 두텁게 하시었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데 외람되어 (제가) 두터운 은택을 받들어 큰 기업(基業 : 조정이 개창을 한 한 국가의 왕업)을 사습(嗣襲)을 하였기에 바로 좋은 날짜를 점쳐서 가려 이로써 갖춘 의례를 펼치고자 하옵니다. 거듭 업드려 헤아리면서 삼가 아무 관직의 아무를 보내어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시(尊諡)를 올려 가로되 신의(神懿)라 하옵니다. 우러러 생각컨대 오직 거울 같이 밝으심으로 이 정성과 충심(衷心)을 굽어 헤아리사 본손과 지손이 만대까지 번지게 하시고 왕조의 역복(曆服 : 한 왕조가 군림하는 역년을 말함)이 억만년 면면히 가도록 하여 주옵소서
 
신의왕후(神懿王后) 죽책문 (竹冊文)
예(禮)는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더 큼이 없고 효성은 낳아 준 근본을 보답하는 것보다 중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책문 찬술하는 전(典)을 쫓아서 시호 정하는 절차를 거행합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성모(聖母) 한씨께옵서 기품은 화(和)하게 타고 나셨고 도는 곤순(坤順)에 부합하셨습니다. 인륜의 근본을 바로하여 길이 길한 운에 맞으셨고 왕화(王化)의 터전을 도와 이룩하셔서 능히 그 후손을 번창하게 하셨습니다. 다만 계사(繼嗣)를 정하지 못한 것으로 하여 그 명위(名位)의 차질이 있었던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신은 외람되게 용재(庸材)로써 이와같이 큰 명을 이었는데 능히 적통을 뺏으려는 난을 평정시킨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사오리까. 실로 하늘에 계신 영(靈)에 힘입어서 이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이에 길한 일진(日辰)을 택하여 특히 조촐한 제수를 드리오매 마땅히 큰 칭호를 올려서 아름다운 공을 들춰야 하옵기에 모관 모(某官 某)를 보내서 삼가 책을 받들어 시호를 올려 신의(神懿)라 하오니 밝게 비추시어 정성을 굽어 살피시옵고 우리 자손들을 열어 주소서.  긴 세대 복되게 하소서.
 
신의왕후(神懿王后) 신도비문(神道碑文)
이 비문은 길창부원군 권근(吉昌府院君 權近)이 짓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서명균(徐命均)이 쓴 것으로 전문(全文 : 전체)을 다 상재(上梓) 하지 못하고 주요(主要)한 전후(前後) 부분문(部分文 : 一部) 만을 실었음.
 
승인순성신의왕후제릉신도비명병서(承仁順聖神懿王后齊陵神道碑銘幷序) 번역문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남에는 반드시 어진 비필(妃匹)이 덕(德)을 같이하고 경사(慶事)를 기리는데 힘입어서 그 계통을 영구히 한다. 하(夏)나라에는 도산(塗山)이 있어 계(啓 : 舜)가 능히 계승하였고 주(周)나라에는 태사(太사 : 文王의 妃)가 있어 무왕(武王)이 크게 계승하여 우(禹)임금과 문왕(文王)의 하늘을 짝하는 제사(祭祀)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계속되었으니 아릅답고 성하도다!
우리 신의왕후(神懿王后)께서 천자(天資가 현숙(賢淑)하고 아름다우며 곤덕(坤德)이 유순(柔順)하고 정숙(貞淑)하여 일찍이 용연(溶淵)에 빈(嬪)이 되어 왕업(王業)을 도와서 이루게 하였고 후하게 성철(聖哲)을 낳아서 대통(大統)을 끝없이 전하였으니 신이(神異)한 공(功)과 아름다운 의범(儀範)이 옛사람에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 아깝게도 대훈(大勳)이 이루어지게 되자 선유(仙遊 : 죽음)가 심히 급하여 태상(太上)께서 개국(開國)하신 뒤에 호의(壺儀)를 높일 수가 없고, 이성(二聖)이 대통(大統)을 이으매 영양(榮養 : 부모를 영화롭게 봉양함)을 이룰 수 없어서 산릉(山陵)이 빛을 가리고 상로(霜露)가 슬픔을 더하니 아아! 슬프다.
처음 시호(諡號)는 절비(節妃)요 능호(陵號)는 제(齊)인데 뒤에 시호를 더하여 신의왕후(神懿王后)라 하고 인소전(仁昭殿)을 두어 진용(眞容)을 모시었으니 추숭(追崇)하는 예전(禮典)이 이미 갖추어 거행되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자의(慈儀)가 영원히 닫히어 효도(孝道)의 생각을 펼 수 없는 것을 슬프게 생각하시어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큰 비(碑)에 명(銘)을 세기게 하고 신(臣) 권 근(權 近)으로 하여금 비문을 지어 만세(萬世)에 보이게 하시었으니 신(臣) 권근(權近)이 명(命)을 받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데 후(后)의 성(姓)은 한씨(韓氏)이니 안변(安邊)의 세가(世家)이다. 황고(皇考 : 부친)의 휘(諱)는 경(卿)이니 충성공근적덕육경보리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령문하부사안천부원군(忠誠恭謹積德毓慶輔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을 주었고 황조(皇祖)의 휘(諱)는 규인(珪仁)인데...중략(中略)
신(臣) 권 근(權 近)이  학식(學識)이 천박(淺薄)하고 필력(筆力)이 비졸(鄙拙)하여 비록 지극히 형용(形容)하나 천지(天地)를 그리는 것 같으니 어찌 능히 만분의 일이나마 비슷하게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주(周)나라 대아(大雅)의 대명장(大明章 : 武王과 그 조상이 나라를 세운 사적을 노래한 것)과 사제장(思齊章 : 文王과 後妃들의 덕을 찬미한 노래)의 뜻을 상고하여 삼가 명사(銘辭)를 지어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올린다. 그 사(詞)에 이르기를 「상제(上帝)가 밝고 성하시어 덕(德)이 있는 이를 계도(啓導)하여 돕나니 사사로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함이 지극 하기 때문이다.
그 계도(啓導)는 무엇인고 하니 유순하고 아름다운 이를 낳아 와서 덕(德) 높은 임금의 배필(配匹)이 된 것일세. 실가지락(室家之樂) 마땅하여 임신(妊娠)하고 생육(生育)하니 그 정령(精靈)이 밝고 밝아 천인(天人)이 기대하던 착하고 어진 이를 낳았네, 거룩한 아버지를 붙들어 도우시고 위대하게 백성들의 임금이 되었네.
몸소 제정(帝庭)에 조회하시여 우리 방토(邦土) 보전하였네, 서얼(庶孼)의 화란(禍亂)이 싹틀 때에 기미를 밝게 살펴 시원스레 소탕하니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편안하게 되었네. 공(功)을 세우고 사양하여 적장왕자(嫡長王子) 높이시니 이륜(彛倫)이 발라지고 기세(基勢)가 더욱 장(壯)하여졌네,
형제(兄第)의 집안 싸움 만났으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그 신명보전(身命保全)케 하시어 우애(友愛)함이 더욱 더 돈독(敦篤)하였네 덕(德)은 높고 공(功)은 크니 황제(皇帝)의 권고(眷顧)를 받는 것이 마땅하여 명(命)을 주심이 중첩하였네, 밝고 밝은 제고(帝誥 : 증국의 황제의 고명(高命))와 빛나고 빛나는 금보(金寶 : 금으로 만든 인장)를 우리 임금이 받으시어 만세(萬世)에 길이길이 보존 하리라. 왕업(王業)의 자취는 조종(祖宗)이 쌓은 것이나 우리의 성신(聖神)은 후덕(后德)으로 말미암았네. 신(臣)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올리는 말씀이 구차한 것이 아니니 만세(萬世)에 밝게 전하여 천지(天地)와 같이 영구하리라.」
비문(碑文)은 권 근(權 近)이 지난 해에 지은 것인데, 화장사(華莊寺)의 묵은 비(碑)를 갈아서 새기었다.

      所在 : 京畿度 開城郡 上道面 楓川里

      年時 : 朝鮮太宗元年辛巳(檀紀 3734 · 西紀 1401) 竪後英祖20年

               甲子(檀紀 4077 · 西紀 1744) 개수(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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