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昭惠王后 : 1437~1504 14세)
소혜왕후는 추존왕(追尊王) 덕종대왕비(德宗大王妃)로 세조(世祖) 때 좌의정(左議政)한 서원부원군(西院府院君) 확(確)의 따님이요 공안공(恭安公) 치인(致仁)의 누님이다. 덕종(德宗)은 세조대왕(世祖大王)이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 도원군(桃原君)의 신분(身分)으로 소혜왕후와 결혼하고 수양대군(首陽大君 : 世祖大王)이 王으로 즉위하고 도원군이 세자(世子)로 책봉(冊封)되자 세자빈(世子嬪)에 책봉(冊封)되었고 후에 아들 성종(成宗)이 王에 올라 아버지를 덕종(德宗)으로 추존(追尊)하고 어머니를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추봉(追封)하였다.
다음은 소혜왕후 유사를 게재(揭載) 하여 후일 참고에 자(資)한다.
덕종대왕비 소혜왕후 유사(德宗大王妃 昭惠王后 遺事)
추존왕 덕종(追尊王 德宗)에게는 소혜왕후(昭惠王后)만이 있다. 흔히 인수대비(仁粹大妃)로 더 잘 알려진 소혜왕후(昭惠王后) 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좌의정 서원부원군 한 확(左議政 西院府院君 韓 確)의 딸로 德宗보다 1년 앞선 世宗 19年 丁巳(檀紀 3770 · 西紀 1437) 9月 8日에 탄생(誕生)하였다.
桃原君 暲의 配匹로 家禮를 치르고 들어왔다가 世祖 1年 乙亥(端宗 3年 檀紀 3788 · 西紀 1455)에 시아버지 世祖가 卽位하고 부군 도원군(桃原君)이 世子로 책봉(冊封)되어 세자빈(世子嬪)으로 수빈(粹嬪)에 冊封하니 이때 나이가 19歲였다. 그러나 2년뒤인 世祖 3年 9月 2日에 世子인 德宗이 급환(急患)으로 돌아가니 21歲로서 청상(靑孀)이 되었다.
그 뒤 소생의 아들 成宗이 卽位한 뒤인 成宗 2년 辛卯(檀紀 3804   西紀 1471)에 夫君을 德宗으로 추존(追尊)되면서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진봉(進奉)되고 연산군(燕山君) 10年甲子(檀紀 3837 · 西紀 1504) 4月 27日에 68歲로 승하하여 시호(諡號)가 소혜(昭惠)로 올려졌다. 그 사이에 휘숙명의(徽肅明懿)의 존호(尊號)를 더하여 받기도 하였다. 많은 일화를 남긴 바 있는 소혜왕후는 불교(佛敎)를 독실히 믿고 불경(佛經)에 조예가 깊어 범 · 한 · 국(梵 · 漢 · 國) 三字體로 쓴 불서(佛書)를 남겼고 특히 婦女子의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위해 편찬한 내훈(內訓)을 남겼다.
소생은 2男 1女를 탄육(誕育)하였는데 長男은 月山大君 정(정)이고 次男은 成宗大王이며 1女는 明淑公主로 당양군 홍 상(唐陽君 洪 常)에게 하가(下嫁)하였다. 神位는 영녕전 서협 제팔실(永寧殿 西夾 第八室)에 德宗과 함께 奉安되어 있고 능소는 敬陵으로 京幾道 高陽市 德陽區 龍頭洞 西五陵에 德宗과 같은 局內 이강(異崗)에 안장되어 있다.
 

봉왕세자 수빈교명(封王世子 粹嬪敎命)

이는 소혜왕후가 처음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의 당부이다.
 
世祖元年乙亥(단기 3788 · 서기 1455) 7月 乙亥日(譯文)
하교하노라.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니 마땅히 좋은 배필이 있어 한 가지로 종묘 사직의 중함을 받들어야 할 것이니와 이르건데 너, 韓氏는 원훈(元勳)이 무성하게 드러난 망족(望族)의 예의있는 명가에서 자라나 일찍 몽사(蒙嗣 : 재상가의 후사를 세조대왕이 잠저에 있을 때 그 맏아들 덕종의 신분의 이름)의 배필로 들어와 유순하고도 온혜하였으므로 지금 춘궁(春宮 : 왕세자)을 세움에 접하여 이로써 너의 위호(位號)를 바꾸고자 명하여 王世子嬪을 삼노니 이 은총의 명을 빛나게 받아 더욱 힘써 도모하고 공경할 지어다.
 

인수왕비 봉숭책문(仁粹王妃 封崇冊文)

成宗2年辛卯正月辛卯(단기 3804 · 서기 1471) 正月辛卯日(譯文)

※주 : 소혜왕후가 성종이 즉위 후에 왕대비로 추존될 때의 글
공손히 우러러 생각컨데 국육(鞠育)하여 주신 은혜를 보답코자 하여도 가이 없어 다만 徽懿之號를 높여 드리고자 하는 바, 예에 있어서는 마땅히 먼저 옛 장전(章典)에 의거해야겠기에 이를 다하여 이에 성대한 식전을 드날리고자 하옵니다. 공손히 생각컨데 자인(慈仁)하고 정일(靜一)하시며 숙신(淑愼)하고 유가(柔嘉)하심으로 昭考(밝으신 아버님의 덕으로 덕종대왕의 이름)의 元良(세자 때의 칭호)을 도와 능히 부도(婦道)를 견지하시고 묘궁(묘躬 : 작고 보잘 것 없는 몸이라는 임금의 부조에 대한 자칭)의 우매함을 가르치사 국모의 의범을 융성하게 하시었으니 특별히 아름다운 칭호가 아니고서야 무엇으로 간절한 추숭(推崇)의 정성을 표할 수 있으오리까. 신 혈(신 : 성종대왕 어휘)은 크나큰 소원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보책(寶冊)을 받들어 존호(尊號)를 올려 가로되 인수왕비(仁粹王妃)라 하옵니다. 업드려 오로지 바라옵나니 이 책보를 빛나게 받으사 순수한 복희(福禧)를 맞으시고 성산(聖算 : 임금의 나이)이 크게 연이어지사 더욱 만세의 경사를 안으시고 장추(長秋 : 내후의 궁전)의 즐거움과 기쁨으로 길이 한 나라의 환희를 누리소서.
 

인수왕비 가상존호옥책문(仁粹王妃 加上尊號玉冊文)

成宗 6年 乙未(단기 3808 · 서기 1475) 2月丙午日(譯文)

※주 : 인수왕비에게 더욱 존호를 드리는글
능히 휘음(徽音 : 왕후의 아름다운 덕망)을 이으사 곤축(坤軸 : 땅의 굴대란 뜻으로 임금에 대한 왕후의 자리)에 적의(翟儀 : 왕후의 위의)를 드러내시었으므로 이에 성대한 아름다움을 청하여 초위(椒위 : 궁정의 내정 담안)에 크나큰 위호를 올리옵니다. 공손히 생각컨데 도리로서는 우빈(虞嬪 : 夏나라 우 임금의 塗山氏)을 이으셨고 덕은 文母(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妊)에 협화하시어 선성(先聖 : 성종의 부왕 덕종의 이름)의 배필이 되시니 내치(內治)를 닦으시고 경계하여 드림에 어긋남이 없으셨으며 小子를 보육하사 오늘의 훌륭함이 있게 하시었으니 그 구로(구勞 : 어버이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 온갖 노고)는 가이 없습니다.
이를 우러러 되돌아보고 생각하매 그 하늘로부터 받으신 빛을 현양(顯揚)해 드리고자 함 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대히 갖춘 예식은 이미 관부와 대궐 안길에 이루어져 융성하온즉 어버이를 높이는 것은 자식의 크나큰 영광이요 효도는 마땅히 그 情文(내용과 형식)을 대해야 하는지라 이로써 아름다움을 돌리는 말씀을 펼쳐 추숭해 올리는 의전을 거행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온건데 보책(寶冊)을 크게 받으사 순한 복을 무저(茂著)히 대하시고 장락(長樂 : 왕후의 궁전)을 즐기고 기뻐하시면서 한 나라의 봉양을 누리시고 멀고도 아득한 장수의 아름다움으로 장차 만년의 환희를 섬겨 받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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