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록(淸白錄)

 
구암공 한백겸(久菴公 韓百謙 : 明宗 7年(1552) ~ 光海君 7年(1615) 19世)
  공(公)은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이다. 휘(諱)는 백겸(百謙)이요 자(字)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유음공(柳陰公) 효윤(孝胤)의 아들이고 군수공 여필(郡守公 汝弼)의 손자이며 정선공 승원(旌善公 承元)의 증손(曾孫)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평산신씨(贈 貞敬夫人 平山 申氏) 로 예빈시정 건(禮賓寺正 健)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明宗) 7년(1552) 4월 11일에 태어났다. 선조(宣祖) 12년(157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동왕 18년(1585)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鄭逑)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이듬해 천거로 중부참봉(中部參奉)이되었으며 이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ㆍ선릉참봉(宜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재직중 병으로 사퇴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때 모반에 실패 하여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殮)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귀향 갔다가 임진왜란 때 대사면령으로 석방 되었다.   석방 될 때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 하여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로로 관직에 재임용,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고, 1595년 호조좌랑, 1601년 형조좌랑, 청주목사, 1607년 판결사, 호조참의에 서용 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어 상례(喪禮)를 주관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강원도 안무사(江原道 安撫使) 1611년 파주목사에 기용 되었다가 사임하고 양주의 물이촌(勿移村)에 퇴거하여 있다가 역학(易學)에 해박하다 하여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였던  주역전의(周易傳義) 의 교정을 맡아보았다. 실학의 연구자로서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 ㆍ 지리를 연구하고, 종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 수정하여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고양하였으며, 그 결과로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저술과  기전고(箕田考)  가운데 실려있는  기자도(箕子圖) ,  기전설(箕田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밖에 저서로 《구암유고(久庵遺稿)》가 있다.
 광해군(光海君) 7년(1615) 3월 7일 졸하니 향년 64세였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원주(原州)의 칠봉서원(七鋒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위(配位) 증 정경부인 능성구씨(贈 貞敬夫人 綾城 具氏)는 판서 사중(判書 思仲)의 따님이고 증 정경부인 함창 김씨(贈 貞敬夫人 咸昌 金氏)는 교위 정준(校尉 廷俊)의 따님 이며 아들은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정온공 흥일(靖溫公 興一) 이다.
 공(公)의 배위(配位) 증 정경부인 능성 구씨(贈 貞敬夫人 綾城 具氏)는 인조(仁祖) 8년(1630) 6월 24일 졸하였고 증 정경부인 함창 김씨(贈 貞敬夫人 咸昌 金氏)는 인조 9년(1631) 10월 29일 졸함에 부평리 가마도 계좌(釜坪里 佳麻島 癸坐)에 삼합조(三合兆)로 안장(安葬)하였다.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가 묘갈(墓碣)을 찬(撰)하였다.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우복 정경세가 찬하고(愚伏 鄭經世 撰)과 죽남 오 준(竹南 吳 竣)이 써서 인조(仁祖) 4년(1626) 수립(竪立)하였는데 비고(碑高)가 16척(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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