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향록(철享錄)

 
오천공 한백유(鰲川公 韓伯愈 : 肅宗 1年(1675) ~ 英祖 18年(1742) 21世) 
 공(公)은 조선 중기(中期)의 학자(學者)이다. 휘(諱)는 백유(伯愈)요 자(字)는 퇴여(退汝)이고 호(號)는 오천(鰲川)이다. 준(濬)의 아들이고 준걸(俊傑)의 손자이며 절제공 중손(節制公 仲孫)의 7대 손이다. 어머니는 진주 최씨(晋州 崔氏)로 서벽(瑞碧)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肅宗) 1년(1675) 태인(泰仁)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하고 학업(學業)과 효행(孝行)이 두드러졌다. 외종조부(外從祖父)인 관곡 최서림(寬谷 崔瑞琳)에게서 수학(受學)하며 사회적 병폐(社會的 病弊)인 사화당쟁(士禍黨爭)을 비탄(悲嘆)하고 사림(士林)으로 머물러 후학(後學)들과 수도(修道)에 힘썼다.
 공을 비롯하여 아우(仲愈 季愈)들의 모부인(母夫人)에 대한 성효(誠孝)는 효행록(孝行錄)에 전하고 있을 정도(程度)로 유명(有名)하다. 공은 만년(晩年)에 향리(鄕里)인 태인(泰仁)에서 오직 저술(著述)에 전념(專念)하여 저작(著作)으로 《천도인도지원해(天道人道之原解)》,《팔괘지의해(八卦之義解)》, 《하도낙서지의회(河圖洛書之義解)》, 《훈몽편(訓蒙篇)》,  《언해삼략(諺解三略)》, 《주해판당음십권(註解板唐音十卷)》, 《주해칠언이백(註解七言李白)》, 《훈해소학대학대의(訓解小學大學大義)》등 많은 훈화서(訓話書)가 있었으나 재화(災禍)로 산질(散秩)되었다.
 공은 영조(英祖) 18년(1742)에 여역(濾疫 : 돌림열병)을 피하여 담양(潭陽)으로 옮겨 살다 이 해 12월 20일에 68세로 졸하였다.
 공의 도덕(道德)은 몰후(沒後)에 더욱 빛나니 영조(英祖) 33년(1757)에 사림(士林)들이 태인(泰仁) ㆍ 井邑市 七寶面)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配享)하였고 순천(順天)에는 중년(中年)에 이곳에서의 흥학(興學)의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해 양사재비(養士齋碑)를 세웠다. 생가유지(生家遺址)는 칠보면 시산리 행단(七寶面 詩山里 杏壇)이다.
 배위 광산 김씨(光山 金氏)는 중하(重夏)의 따님이고 아들은 수신재 종묵(守愼齋 宗默), 종눌(宗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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