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향록(철享錄)

 
남당공 한원진(南塘公 韓元震 : 肅宗 8年 ~ 英祖 27年(1682~1751)23世)
 공(公)은 조선 후기(後期)의 학자(學者)이다. 휘(諱)는 원진(元震)이고, 자(字)는 덕소(德昭)이며 호(號)는 남당(南塘)이다. 통덕랑공 유기(通德郞公 有箕)의 아들이고 현감공 여익(縣監公 如益)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9대손이다.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 朴氏)로 도정 숭부(都正 崇阜)의 따님이다. 공은 숙종(肅宗) 8년(1662) 9월 13일생이다.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인 권상하(權尙厦)의 제자들인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8세에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문장 파악이 매우 느렸으나 수년을 지나자 한번 본 문장을 곧바로 암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12세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상례를 지켰다.
 숙종(肅宗) 43년(1717)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영릉참봉이 되었고 경종(景宗) 1년(1721)에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 임사화(辛, 壬士禍)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영조(英祖) 1년(1725)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學問)을 진강, 영조(英祖)의 총애를 받았으나 《맹자》의 ‘신시군여구수(臣視君如仇讐)’의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 하여 삭직되었다.
 1741년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 그 뒤 장령,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 사리에 명철하였으며, 《주역》 ㆍ 《시경》ㆍ 《서경》ㆍ 《사서(四書)》ㆍ 《태극도설》ㆍ 《통서(通書)》ㆍ 《계몽(啓蒙)》 및 여러 경세서(經世書) 등을 정독하여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그밖에 율려(律呂)ㆍ천문ㆍ지리ㆍ병가ㆍ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당시 성리학의 중심과제에 두루 미치고 있었으며, 17, 18세기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실학이 남인학자층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여 이 이(李 珥) ㆍ 송시열 ㆍ 권상하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심성론논쟁(心性論論爭)에서 낙론(洛論)인 이 간(李 柬)을 중심으로 하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주장에 반대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인물성이론의 주장을 대표하였다.
  그의 심성설의 구조는 우주만물의 생성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주에는 양건(陽健)한 기(氣)로서 남성적인 것이 되며, 음순(陰順)한 기로서 여성적인 것이 되는 기화(氣化)의 단계, 음양의 기가 모여서 만물의 형체를 이루는 형화(形化)의 단계가 존재하며, 형화를 통하여 형성된 형체의 내부에도 기화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만물의 생성의 기화. 형화, 형화 속의기화 등과 같은 삼층의 구조로서 파악하며, 이 삼층구조를 심성설에 적용하여 성(性)을 삼층구조로 파악한 것이 성삼층설(性三層說)이다.
 그는 이 성삼층설에 입각하여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刑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 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또한 성은 이(理)가 기질 속에 내재된 뒤에 운위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이 이의 생각을 계승하여, 인성과 물성은 기질을 관련시키게 되는 인기질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사고를 근간으로 그는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전개한 것이다. 미발심체(未發心遞)의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도 그는 미발(未發)의 심체(心體)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간과는 달리 미발한 심체에도 선악의 가능성이 공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미발심체유선악설(未發心體有善惡說)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주역》을 중심으로 하는 역학에도 미치고 있었으며, 그와 관련된 저술로서 《역학답문(易學答問)》 ㆍ 《역학계몽(易學啓蒙)》 ㆍ 《거관록(居觀錄)》 ㆍ 《문왕역석의(文王易釋義)》등이 있다. 이들 저술을 통하여 볼 때 역에 관하여 자연지역(自然之易)ㆍ 괘획지역(卦劃之易)ㆍ문자지역(文字之易) 등이 있다고 하는 독특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의미를 윤리도덕적으로 파악하는 성리학적인 역학관의 입장에 섰다.
 그의 많은 저술 가운데 1741년에 저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이 착수한 것을 그의 스승인 권상하를 거쳐 50년만에 완성한 한국성리학사상의 거작이었다. 저서로는  《남당집》  38권(二集)이 있고, 편저로 《임시취고(臨時取考)》ㆍ 《퇴계집소석(退溪集疏釋》ㆍ 《의례경전통해보(儀禮經傳通解補)》ㆍ 《장자변해(莊子辨解)》ㆍ 《선학통변(禪學通辯)》 ㆍ 《왕양명집변(王陽明集辨)》 ㆍ 《거관록(居觀錄)》 ㆍ 《심경부주차기(心經附註箚記)》 ㆍ 《춘추별전(春秋別傳)》 ㆍ 《근사록주설(近思錄註說)》 ㆍ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ㆍ 《가례소의의록(家禮疏擬疑錄)》 ㆍ 《가례원류의록(家禮源流疑錄)》 ㆍ 《고사편람(古事便覽)》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저술 가운데에서  경의기문록 과 주자언론동이고 를 제외한 나머지 문집의 대부분은 그 판본이 김천 직지사(直指寺)에 수장되어 있었으나 이 황(李 滉)의 학설과 위배되는 설을 제기하였다는 이유에서 어사 김정희(金正喜)의 방화로 회신(灰燼)이 되어 희귀본이 되었다.
 공은 영조(英祖) 27년(1751) 2월 8일 70세로 졸하였다. 공은 삼교 무진 족보간행(三校 戊辰 族譜刊行)에 힘썼고 서문(序文)을 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성주 무계서원(星州 武溪書院), 홍성 양곡사(洪城 暘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위(配位) 증 정부인 창녕 성씨(贈 貞夫人 昌寧 成氏)는 중광(重光)의 따님이고, 증 정부인 여흥 민씨(贈 貞夫人 驪興 閔氏)는 진화(鎭華)의 따님이다.
 아들은 후은(後殷), 후종(後宗), 현감 후현(縣監 後賢)과 후준(後準, 無后)이다. 공과 배위(配位) 증 정부인 창녕 성씨(贈 貞夫人 昌寧 成氏), 증 정부인 여흥 민씨(贈 貞夫人 驪興 閔氏 父 鎭華)와 삼합조(三合兆)이다.
공이 몰(歿) 177년 후인 1927년 9월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위치 : 忠南 洪城那 西部面 新里
 양곡사(暘谷祠)는 1985년 준공(竣工)하였고, 춘추(春秋) 陰 2월 10일, 8월 10일에 제향(祭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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