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향록(철享錄)

 
조은공 한몽삼(釣隱公 韓夢參 : 19世)
  公의 諱는 몽삼(夢參)이니 초휘(初諱)는 몽인(夢寅)이요, 字는 자변(子變)이고, 號는 조은(釣隱) 또는 적암은인(適巖隱人)이다. 선조(宣祖) 23년 2월 21일 생으로 아버지는 종묘봉사(宗廟奉事)를 지낸 계(誡)요 조부(祖父)는 호당(湖堂) 여철(汝哲)이다.
 公은 박제인(朴齊仁), 장현광(張顯光) 등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兄) 몽룡(夢龍) 밑에서 학업에 정진(精進)하여 광해(光海) 5년(1613)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及第)하였고 인조(仁祖) 17년(1639)에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3개월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나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관직을 멀리하고 산수(山水)가 수려한 파릉군(巴陸郡)의 서계(西溪)가에 은거(隱居)하였다.
 公이 선조 기축(宣祖 己丑 : 1589)에 출생하여 현종 임인(顯宗 壬寅 : 1662) 11월 25일에 壽 74세로 별세(別世)하였다.
 公의 배위(配位)는 창녕장씨(昌寧 張氏)로 참봉 익기(參奉 益棋)의 따님으로 묘소는 경남 의령(宜寧) 유곡(楡谷) 선영(先瑩)이다.
 公의 墓碑文은 광성군(廣成君) 안정복(安鼎福)이 찬(撰)했다.
 公의 몰후(歿後) 숙종(肅宗) 28년(1702)에 임천서원(臨川書院)에 배향(配享)하여 公의 학행(學行)을 기렸고 그후 영조(英祖) 5년(1729)에는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에 증직(贈職)되었다.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하여 고을 유림(儒林)이 뜻을 모아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방손(傍孫) 한갑수(韓甲洙 : 文學博士)가 지었다.
 公의 長子는 左承旨 時晦요, 次는 司馬試에 合格한 時龜, 武科한 時挺, 萬戶를 지낸 時相, 樂官을 지낸 時立인데, 二子 時憲은 伯父 夢龍에 系后하였다.
 公의 저서(著書)로는 《조은집(釣隱集)》  4권이 있으며 문한(文翰) 열사(烈士)들의 기문(記文), 문집서(文集序), 행장(行狀), 현판(縣板), 편액(扁額) 등의 많은 유묵(遺墨), 유작(遺作)이 있다.
 조은공(釣隱公) 外 17인이 세강계(世講契)를 만들어 학문(學問)을 펴고 사회순화(社會醇化)를 도모(圖謀)하였고, 그 후손들이 서로 친목(親睦)을 이어오고 있으니 지금도 매년 음 3월 26일에 위 18현(十八賢)의 추모행사를 하고 있는 바 그와 같은 미행(美行)을 유적비(遺蹟碑)에 담아 경남 하동군 하동읍 쌍계사(雙溪寺) 경내(境內)에 비석(碑石)을 세웠다.
임천서원(臨川書院)에는 조은공(조隱公) 외에 이준민(李俊民 : 孝翼公), 강응태(姜應台 : 弼善), 성여신(成汝信 : 進士), 하 등(河 燈) 오현(五賢)을 배향(配享)하였는데 숙종(肅宗) 28년(1702)에 건립(建立)되어 숙종(肅宗)이 사액(賜額 : 臨川書院)하였다.
그 후 고종(高宗) 때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다시 중건(重建)하고 유림(儒林)이 추모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공(公)이 별세(別世))하니 사영동(沙寧洞) 선영하(先瑩下) 자좌(子坐)에 안장(安葬)하였다가 숙종(肅宗) 병술(丙戌 : 1706)에 현재(現在)의 하동읍 흥룡리로 이장(移葬)하고 묘하(墓下)에 재실(齋室)을 건립(建立)하여 모도재(慕道齋)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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