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판공 한계선(參判公 韓繼善 : 1426~1487 14世)
公은 세종 8년(1426) 12월 28일 생이다. 함경도 관찰사(咸鏡道 觀察使) 혜(惠)의 넷째 아들이고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문간공 상경(文簡公 尙敬)의 손자이다.
公이 천자(天資 : 타고난 성품)가 영오(穎悟 : 남보다 뛰어나게 영특함)하고 재주와 지혜(智慧)가 총민(聰敏 : 슬기롭고 민첩함)하여 어려서 능히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알고 자라서는 서사(書史 : 經書와 史書)에 마음이 독실하여 경전(經典 : 經書)을 연구하고 성리(性理 : 人性의 原理)를 속깊이 연구하는 것으로써 평생(平生)의 사업으로 삼고 있다가 성종조(成宗朝)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歷任)하고 돌아와서 이르되 ‘벼슬길에 나돌며 이름을 구하고 재능(才能)을 자랑하는 것은 고결(高潔)한 선비의 일이 아니다’라고 하며 향리(鄕里)에서 살며 서사(書史)를 벗삼아 세상을 보냈다. 또 한 집을 다스림에 법도(法度)가 있어서 일찍이 자손에게 경계(警戒)하기를 무릇 몸을 망치고 집을 허물어 뜨리는 이는 모두 만족함을 알지 못하고 지나친 욕심에서 연유(緣由)하는 것이다. 만족함을 아는 자는 마땅히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근본으로 하여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는 것으로써 날마다 부신(符信)으로 삼으면 만사(萬事)가 안전하리라 하고 의기(意氣)가 서로 맞는 친구들과 함께 자연(自然)을 벗삼아 아무 구애됨이 없는 삶을 살다가 성종 정미(成宗 丁未 : 1487)에 62세에 졸하니 사림(士林 : 선비들)이 애석해 하였다.
 
位置: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산 126번지
 
公의 墓所는 本來 配位 貞夫人 南平 文氏와 上(配位) 下兆(50步 相距)였으나 1996년 4월에 配位 文氏를 公과 合폄으로 緬奉하였고, 따라서 墓碑도 公墓前에 雙立으로 移竪했다.
公의 墓表가 오랜 歲月에 풍마우세(風磨雨洗)하여 配位의 墓를 옮겨 公과 合폄하고 새로 이 개수(改竪)하였다. 碑文은 公의 19代孫 긍희(肯熙)가 짓고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이 改竪碑는 1982년 10월 3일 공의 時享日에 세웠다.
公에게는 4男 3女가 있으니 長男이 通訓大夫 行燕岐縣監 珽 이요 次는 司憲監察을 지낸 松禾縣監 瑾이요 次는 桶政大夫 行振威縣令 개이고 季는 通政大夫 行祥雲道察訪 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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