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간공 한 리(忠簡公 韓 理 : ?~太宗 17年(1417) 11世)
공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며 휘(諱)는 리(理)이다. 평간공 공의(平簡公 公義) 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묘 배향공신(忠惠王廟 配享功臣)인 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사숙공 악(三重大匡 都僉議 右政丞 思肅公 渥)의 손자이다.
 공민왕 11년(1362) 10월, 감문위 녹사(監門衛錄事)로서 문과에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제17인으로 급제한 후 우왕(禑王) 1년(1375) 7월, 시중 이인임(侍中 李仁任)이 김 의(金 義)와 공모하여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도 죄를 면하였다는 등 네 가지 죄목을 들어 간관 이첨(諫官 李詹)과 전백영(全伯英)이 상소하므로 한리가 친종호군(親從護軍) 으로서 옹양군 상호군 우인열(鷹楊軍 上護軍 禹仁烈)과 함께 이인임의 뜻에 호응하여 글을 올려 이르기를 "간관(諫官)이 재상을 논핵(論劾)하는 일은 작은 것이 아니오니 변 백(辨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 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일찍이 공민왕이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더니 급기야 사건이 발생하자 우왕(禑王) 2 년(1376), 한 안(韓 安)의 족(族)이라 하여 공을 먼 고을에 유배하였다.
 공양왕(恭讓王) 3년(1391) 7월, 세자를 명나라에 조현(朝見)하려고 함에 한 리가 예조판서(상서)로서 상소하여 이르기를 “지금 세자로 하여금 조현케 하려 하오나 신 등이 그윽히 생각컨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에 명나라 조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말(馬) 만필(萬匹)을 구입하려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보낸 것은 2천 필에도 달하지 못하였으니 갑자기 세자로서 입조(入朝)케 하였다가 만약에 명나라에서 늦어진 것을 책망하게 되면 세자가 무엇으로서 대답하오리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다시 신료(臣僚)들로 하여금 의논하여 시행토록 하소서”하니 왕이 도당(都堂)에 명하여 이를 의논케 하였다.
 그 해 12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吏部尙書)가 되었으며 이에 앞서 공은 한 천(韓 천)과 우성범(禹成範), 강준(姜準)과 함께 벼슬하여 매우 교분이 돈후(敦厚)하였으며,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도 사생을 맹서한 친우로서 사돈을 맺었고, 문장덕행(文章 德行)으로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혈족간(血族間)의 비호(庇護)로 유배를 면하고 조선조(朝鮮朝)가 건국된 뒤에는 태조(太祖)의 명으로 고려 왕실인 왕씨의 제사를 총괄하였으며 태조 3년 7월 17일에 왕이 왕씨의 명복(冥福)을 천(薦)하여 전예의판서(前禮儀判書:尙書) 한 리에게 명하여 법화경(法華經) 4부를 금(金) 글자로 써서 각 사(各 寺)에 분치(分置)하게 하였다. 한때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폄직(貶職)된 후 태종(太宗) 5년(1405) 노비변경(奴婢辨正) 사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양인인 박상문(朴尙文) 등을 민 제(閔 齊), 권 홍(權 弘)등이 천인으로 만들어 사역시켰던 사실이 알려졌다. 태종은 사헌부(司憲府)와 형조(刑曹)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시켰는데 전 계림부윤 한 리(韓 理)도 이 일에 연루(連累)되어 안성(安城)으로 유배되었다가 몇년 후 풀려나 집에 기거 중 태종 17년 (1417) 11월 13일에 졸하니 태종은 시호(諡號)를 충간(忠簡)이라 내렸으며 장례품 일체를 하사하는 후대(厚待)를 베풀었다. 이는 왕의 총애가 지속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배위(配位)는 정부인 광산 김씨(貞夫人 光山 金氏)로 충정공 속명(忠靖公 續命)의 따님이고 아들은 문과총제(文科摠制)로 정포은(鄭圃隱)의 서(壻)인 승안(承顔)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청성군(淸城君)인 승순(承舜)이다.
 공은 고위 평간공 묘하 청룡 하단(考位 平簡公 墓下 靑龍 下端) 300m 쯤의 계좌(癸坐)에 안장(安葬 上兆)하였고 배 정부인 광산 김씨(配 貞夫人 光山 金氏)는 하조(下兆) 이다. 공 졸후(公 卒後) 102년인 중종(中宗) 14년(1519) 5대손 영의정 효원(領議政 效元)이 갈명(碣銘)을 짓고 406년이 지난 1925년에 18대손 참정대신 규설(參政大臣 圭卨)이 지은 묘표(墓表)도 6 · 25전란으로 훼상(毁傷)되니 제손(諸孫)이 신비(新碑)를 도모하여, 1993년 4월 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조경한(臨時政府 國務委員 臨時政府 紀念事業會長 趙擎韓) 찬(撰)으로 개수(改竪)하였고 매년 청명일(淸明日)에 세일제(歲-祭)를 드린다.
 
 位置:京畿道 坡州市 津東面 瑞谷里 癸坐
 歲享日:淸明日
 忠簡公(諱 理) 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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